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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란 Dec 04. 2021

까페에서, 안녕

죽기 전에 써본 나의 장례식

나는 길가에 서 있는 자동차의 짙은 유리창에 허리를 살짝 숙이고 몸을 비추며 넥타이 매듭을 고쳐맸다. 그리고는 반듯하게 서서 자켓 아랫단을 손으로 잡고 탁탁 쳐 내리며 옷의 주름을 폈다. 고개를 숙여 몸의 왼쪽과 오른쪽을 이리저리 번갈아 돌아봐도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일년에 몇 번 입지 않는 갈색면 체크 정장은 일부러 맞게 않게 수선한 듯 묘하게 겉돌았다. '참 유난스러워'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친구 J가 원하는 대로 옷을 입었다. 정장이지만 단색이 아닐 것. 넥타이를 반드시 할 것. 가능한 독특한 색상과 소재를 선택할 것. 이것이 J가 원하는 조건이었다.


화장실 밖으로 나온 나는 편의점 옆에 있는 낡은 출금기 앞에 섰다. 차양이 있었지만 비바람을 오랫동안 맞았는지 곳곳이 녹슬어 있었다. 그러나 사람을 식별하고 잔액을 확인하고 출금을 하는 본연의 기능은 또렷하게 작동하는 것이 어쩐지 기특했다. 10만원의 현금과 5만원권을 선택하니 타락, 하고 계수기가 숫자를 세다 만 실없는 소리를 냈다. 나는 출금한 돈을 넣은 하얀 봉투를 왼쪽 자켓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넣고 주위를 둘러봤다. 오늘은 친구 J의 장례식이다. 그런데 난 지금 병원이나 전문 장례식장이 아닌 종로 2가에 있는 A빌딩 앞에 서있다. J의 장례식에 제대로 찾아온 것이 맞다.


나는 휴대폰을 열고 메시지 수신함을 확인했다. 분명 이 건물 2층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1층이 편의점, 2층에는 카페, 3층은 사무실 밖에 없다. 크기도 작다. 기껏해야 20 여 평이나 될까? 나는 설마 하며 좁다란 통로의 계단을 올랐다. 그러자 귀에 낯익은 음악소리가 들렸다. 2층에 가까워 올수록 J가 늘 즐겨 듣던 재즈가 더 진해졌다.


'트럼펫, 쳇 베이커였나... 참 너 답다'


나는 다시 작게 중얼거리다가, 카페 문 앞 붙인 종이에 '보헤미안 로스팅 커피 무제한 무료'라는 문구를 보고 기어이 풋 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J가 장례식장으로 선택한 카페 앞, 무릎 정도 높이의 나무 입간판에는 열고 닫는 시각과 요일까지 써있었다.


이른 9시부터 늦은 9시까지, 이번 주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J를 알고 있었거나, 혹은 모르더라도


카페, 빈소, 아니 카페의 문을 열자 진한 커피향과 함께 쳇 베이커의 트럼펫 소리가 더 크게 귀에 울렸다. 문 옆에는 J가 아끼던 턴테이블이 있었고 벽에 기대어 세워놓은 LP 자켓에는 쳇 베이커의 젊은 시절 옆 모습이 흑백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카페 안에는 여덟 개 남짓의 원형 나무 테이블이 각각 서너 개의 의자와 함께 자리 잡고 있었고 반 정도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조용히 대화를 나누거나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는 그들의 모습을 보니 여느 카페의 오후 풍경과 다를 바 없었다. 몇몇 얼굴이 손을 들고 내게 아는 체를 했다. 그들 역시 빈소에서는 절대 입지 않을법한 옷차림들이었다. 우리는 옷차림에 대한 곤란함으로 모종의 유대감을 나누며 가벼운 미소와 눈인사를 나눴다.


까페 안에는 J가 생전에 찍거나 찍힌 사진, 그가 그린 그림, 즐겨 읽던 책, 몇 권의 그가 쓴 에세이와 소설 그리고 시집, 그가 짧게라도 언급되었던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가 테이블과 책장에 특별한 질서 없이 쌓여있거나 세워져 있거나 마스킹 테이프로 벽면에 붙어 있었다. 그렇게 자기 만의 공간이 갖고 싶다고 노래부르더니 이런 시점에 이런 방법으로 이루는 구나 싶었다.


이 공간은 J의 취향으로 가득했다. 그는 무엇인가 쓰는 것을 그렇게도 좋아했다. 손글씨도 좋아했지만 특이하게도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것도 굉장히 즐겼다. 아니나 다를까, 공간 한켠에 3단으로 된 나무 선반에는 그가 사용하던 키보드가 줄을 지어 놓여져 있었다. 아무 키보드로나 쓸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던 J의 말이 생각났다.


"파나마 게이샤로 주세요."


나는 나름의 애도로서 J가 즐겨 마시던 커피를 주문하고, 준비한 봉투를 건냈다. 잠시 후 동그란 커피잔에 J의 커피가 담겨 나왔다. 나는 잠시 향을 맡고, 입술을 대어 커피를 맛봤다. 파나마 게이샤 특유의 부드러운 신맛과 풍미가 났다. 나는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J는 참 좋아했다. J는 지인은 많았지만 곁을 쉽게 내어 주진 않았다. 내게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는 거의 연락이 없던 그다. 


그럼에도 나는 J가 꽤 맘에 들었다. 그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노력했고, 출판해도 좋을 법한 썩 괜찮은 글을 많이 썼고, 듣기 편안한 목소리를 갖고 있었으며, 깊고 길게 사유하고, 타인에게 한결같이 상냥했다. 오늘 이 공간도 내게는 J의 선물과 같이 느껴진다. 인생과 관계가 그렇듯 J도 나도 누군가에게는 언젠가 잊혀지겠지만 나는 꽤 오랫동안 그가 그리울 것 같다.



작가가 생각하는 생의 의미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chanrran/31


작가의 짧은 글이 궁금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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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https://unsplash.com/photos/g6e641CiHF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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