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기의 교육 - ② 교육의 시작을 준비
“아이에게는 그 시기에 유익한 모든 것을 가르치는 것이 좋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하루 시간은 충분히 활용된다. 어째서 당장 그에게 적합한 공부를 시키지 않고, 그가 도달할 수 있는지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 시기의 공부를 시키는 것인가? “그러나 필요할 때 꼭 알아야 할 것을 미리 배우는 것은 시기를 얻는 것이 아니냐?”고 당신들은 말할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단지 그보다 더 일찍부터 가르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서, 배울 생각이 없는 것들을 가르칠 수 없으니 배울 생각이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루소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아주 긴 이야기를 여러 개를 소설처럼 만들었다. 적당히 허공에다 외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예를 들어, 루소와 에밀은 산책을 나갔다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식사 때를 놓치고, 집으로 돌아갈 방향을 몰라서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러다가 전에 봤던 마을 지도를 생각하고, 시간과 태양의 위치, 그림자로 미루어 길을 찾아서 곤경을 벗어나며 천문학에 대한 흥미를 일으킨다.
또, 종종 질이 낮은 포도주에는 일산화납을 넣어서 건강에는 좋지 않지만 맛은 괜찮은 와인으로 변하게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산화납이 들어 있는지를 알아내어 좋은 포도주를 판단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며 화학에 대한 흥미를 일으키려 하였다.
그 외에도 여러 이야기를 보여주면서 학생이 자연스럽게 학문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 노력하고, 어떤 경우에는 실패하고 어떤 경우에는 성공하였는지 사례를 보여주려 하였다. 이를 통하여 아이에게 지금 유익하고 필요한 것을 가르쳐야 하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권위로 강요하지 말고 흥미를 불러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다.
말은 맞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교과서의 진도에 맞추어 교육을 시작한다. 한글을 배우고, 수를 배우고, 사회와 과학을 배운다. 그런데, 선생님 혹은 부모가 아이들이 배우는 모든 것들에 흥미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길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줄 수 있을까? 거의 불가능한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데도 루소는 방법은 모르겠다고 한다. 자기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무책임하게 던져버린다. 심지어 책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책은 싫다. 책은 알지도 못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을 가르칠 뿐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이제 지치기 시작한다. 현실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맞는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답답한 마음이다. 하지만, 다행이도 이내 실마리를 준다.
“많은 책들 속에 흩어져 있는 많은 가르침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흥미를 가지고 공부해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아이에게도 자극이 되도록, 어디에나 있는 하나의 대상에 한데 모을 수는 없을까? 인간의 모든 자연적인 필요가 아이의 정신으로도 잘 알 수 있도록 나타나 보여지고, 그 필요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마찬가지로 쉽게 이어서 펼쳐져 가는 그런 상황을 만들 수가 있다면, 그런 상황의 생생하고 소박한 묘사에 의해서 비로소 아이의 상상력을 최초로 훈련시켜야 한다. ... 아무래도 우리에게 책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의 생각으로는, 자연 교육의 개설을 제공하는 가장 잘된 한 권의 책이 존재한다. 이 책은 나의 에밀이 읽는 최초의 책이 될 것이며, 그것은 또 언제까지나 거기에서 특별한 지위를 차지하는 책이 될 것이다. … 그것은 로빈슨 크루소다.”
루소는 에밀을 교육시키면서 독립적이고, 신체적으로 건강한 아이로 키웠다. 그런 그에게 학문적 관심을 일으킬 가장 적절한 책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고른 것이다. 학생 에밀이 충분히 관심을 가질 수 있고, 선생 루소가 학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녹아 있는 책이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
아이의 관심이 무엇에 있는지 잘 살펴야 한다. 그리고 아이의 자존감과 흥미도 살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비로소 자연스럽게 교육을 시작할 수 있다. 이것을 위해서 부모와 교사가 모두 노력해야 한다. 나의 경험상, 이런 자연스러운 배움의 시작을 거치지 않은 채로 읽어야 할 책을 주거나 수업을 시작하면 좇아 오는 아이들은 10% 내외다. 그나마도 좇을 뿐, 배움을 이끌어가는 주체로써 활동하는 아이는 거의 없다. 이 부분에서 아이들은 자신을 배움의 주체가 아니라, 가르침의 객체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너무 슬픈 일이다.
배움은 즐겁고 유익한 일이다. 운동도, 음악도, 미술도 모두 그렇다. 잘하면 더 즐겁지 않은가? 아이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배움의 즐거움과 유익함을 망쳐버린다면 그건 절대로 좋은 시작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