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살면 큰일 날 것 같았다
처음부터 우리나라를 싫어했던 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사랑했고, 열심히 살면 나도 이 사회 안에서 자리 잡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아도, 노력은 반드시 보상받는다고 배웠다.
하지만 그 믿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20대에 행정고시에 실패하고, 무스펙으로 사회에 던져졌을 때
처음으로 세상이 나를 밀어내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때 밀려왔던 상실감은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신념이 무너지는 감정에 가까웠다.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그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앞이 깜깜했다.
게다가 집안 사정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그보다 더 무거웠다.
매일같이 뉴스에서는 고령화, 청년실업, 저출산, 40대에 잘린 사람들의 이야기가 쏟아졌다.
나라가 점점 기울고 있다는 말이 남이야기처럼 들리지 않았다.
“이렇게 계속 살면 나도 언젠가 무너질 거야.”
그 불안이 내 가슴 한쪽에서 도사렸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야 할 20대 새파란 청춘의 시기에, 나는 가장 캄캄한 어둠 속을 걷고 있었다. 내 노후까지 확실한 플랜이 세워지지 않으니 살아도 불안했다. 다들 그런 계획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미련하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취미보다 생존을 걱정해야 했고, 희망보다 불안이 더 익숙했다.
'공무원이 아닌 이상, 평범한 직장에 다녀서 안정된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노후를 버틸 여유 있는 자금을 가질 수 있을까?'
그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때 취직했던 회사에서 유튜브 PD로 일하며 승진도 하고, 월급도 오르고, 대표님께 인정도 받았다.
겉으론 안정돼 보였지만 마음속은 늘 흔들렸다. 대표님께 지금도 감사하고, 동시에 죄송하다.
하지만 “이 길이 정말 내가 나이 들어서도 끝까지 갈 수 있는 길일까?”
그 물음이 매일같이 내 가슴을 두드렸다.
그때의 나는 내 인생 생존 플랜을 찾아야했다.
한국이라는 곳에서, 평범하게 늙고 죽는 삶조차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그 무렵, 당시 여자친구였던 지금의 아내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우리 삼촌이 같이 캐나다로 가보자고 하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캐나다라니.
내 인생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던 단어였다.
삼촌은 비용을 지원해주시겠다고 했다.
이미 믿을 만한 이주공사를 알고 계셨고, 정착도 어렵지 않을 거라 하셨다.
“한국이 너무 힘들면… 우리를 알아줄 수 있는 새로운 곳에서 다시 시작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
그 말이 내 안에 묘하게 오래 남았다.
그날 밤, 나는 노트북을 켜고 ‘캐나다’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쳤다.
눈 덮인 산맥, 끝없이 이어진 도로, 푸른 하늘 아래 고요한 호수.
사진 속의 모든 풍경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여기라면, 다시 숨 쉴 수 있을 거야.”
한국에서는 보지 못한 광활한 자연, 예쁜 마을,
누구든 최소한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복지제도, 연금,
워라밸, 가족과의 시간, 그리고 영어를 배울 수 있는 환경.
그 모든 게 내겐 ‘탈출구’이자 ‘두 번째 기회’처럼 보였다.
“그래, 이게 내 인생의 진짜 전환점일지도 몰라.”
오랜만에 마음속에서 희미한 빛이 번졌다.
마침내 하나님이 내게 작은 동앗줄 하나를 내려주신 것 같았다.
그 빛이 너무 따뜻해서, 나는 더 이상 뒤돌아보고 싶지 않았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다.
우리 둘 다, 그 빛에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결국 우리는 떠나기로 했다.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캐나다로 간다고 알렸고, 그날 이후 내 일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민 서류를 확인했고, 밤에는 항공권과 숙소를 비교했다.
코로나로 국경이 꽁꽁 막혀 있던 시절이었지만, 방법은 반드시 있었다.
어떤 장애물과 난관도 그 당시의 나를 멈추게 하지 못했다.
캐나다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었다.
그 지역은 토론토나 밴쿠버처럼 화려한 도시가 아니었다.
지도에서 손톱만 한 크기로 표시된, 이름조차 낯선 소도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조용했고, 복잡하지 않았고, ‘다시 시작하기 좋은 곳’처럼 느껴졌다.
회사도 정리했다.
마지막 출근날, 대표님께 인사를 드리며 마음이 복잡했다.
그동안 나를 믿어주셨고, 승진도 시켜주셨는데
무언가를 지키는 삶보다, 다시 살아보는 삶을 택하고 싶었다.
이민 서류는 빠르게 통과되었다.
격리 기간을 위한 호텔을 예약하고, 이삿짐을 최소한으로 꾸렸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속도였다.
한두 달 만에 인생 전체를 옮길 준비를 마쳤다.
친구들에게는 작별 인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일부러 피했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떠나고 싶었다.
이 나라의 모든 비교와 압박, 그리고 불안을 뒤로 남겨두고 싶었다.
모든 게 버거웠다.
끝없는 비교 문화, 경쟁은 치열했고, 기회는 적었다.
모두가 가족과의 행복보다 물질적인 풍요를 택했다.
노후는 불안했고, 출산은 ‘용기 있는 선택’으로 불릴 만큼 두려운 일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떠나는 게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이 사회에 남는게 두려운 게 아닌가.
오히려 너무 기뻤다.
비행기 표를 손에 쥔 순간, 마치 무거운 사슬 하나가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스스로 다행이라고 느꼈다.
적어도, 이곳에서 벗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숨이 트였다.
‘한국이라는 헬조선에서 빠져나왔다.’
그때의 나는 그렇게 믿었다.
마치 게임 속 캐릭터가 한 단계 레벨업이라도 한 것처럼,
가벼웠고, 행복했다.
항상 도파민이 솟아오르는 사람처럼 들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이유도, 계획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떠나야 했다.
그게 나의 유일한 미션이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것을 해내고야 말았다.
정말로 이곳을 떠났다.
하하!!!...
그때의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웃을 수 있었다.
2021년 5월 22일, 우리는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문이 열리고 차가운 봄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안도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제 정말 끝났구나.”
긴 터널을 빠져나온 사람처럼 숨이 시원하게 들이마셔졌다.
공항 분위기는 코로나 때문에 삼엄했다.
구경할 틈도 없이 곧바로 코로나 격리 지정 호텔로 향했다.
하지만 나의 마음만은 달랐다.
기계음이 울리는 공항, 낯선 영어 방송, 두꺼운 공기의 냄새까지
그 모든 게 새로웠다.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기였다.
호텔로 이동하는 짧은 길,
유리창 너머로 스며드는 햇볕이 다르게 느껴졌다.
색이 더 옅고, 공기가 투명했다.
그 안에 새로운 삶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내와 삼촌, 그리고 삼촌의 조카까지 함께 이동했지만,
피곤하지도, 귀찮지도 않았다.
마음은 가볍고, 세상은 넓었고, 모든 게 설렘으로 가득했다.
그 작은 호텔방 안에서 우리는 웃었다.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모든 게 괜찮았다.
그날의 공기와 햇살, 그 미묘한 온도까지도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는 몰랐다.
캐나다의 땅을 밟은 그 순간이
앞으로 이민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는 걸.
곧 불어올 찬바람이 내 인생을 얼마나 흔들어놓을지도 모른 채,
나는 간만에 찾아온 따뜻함에 안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