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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오후의 정적을 산책한다
By chaos 지니 . Apr 20. 2017

< 봄의 향연 > 속으로

아름다운 하모니에 취하다


봄꽃들이 한창 위용을 뽐내고 있는 중이다. 무채색에 가까운 벚꽃들의 향연이 끝나고 온통 울긋불긋한 색으로 갈아입고 있다. 화사한 봄 햇살에서 한층 강렬한 여름으로 인도하고 있는 색감이다.  나는 홀로 이 풍성한 아름다움을 즐기고 있다.


계절의 변화를 보고 있자면 대자연의 한낱 인간으로 태어났음이 이렇게 행복한 것임을 체감하게 된다. 자연의 작은 존재임이 불만이거나 자신이 더 드러나야 한다는 욕심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말없이 일깨운다. 이 아름다운 하모니에 합류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정적이 흐르는 오후. 사람 소리도 자동차 소리도 없다. 모두 나른한 오후의 꿀잠을 자는가 보다. 그렇다고 소리를 매개하지 않는 듯한 진공상태는 아니다. 소리가 들리기는 한다. 들릴 듯 말 듯 잔잔하게 울리는 자연의 소리. 간간이 새소리가 잔잔한 교향곡의 클라이맥스처럼 엑센트를 울리며 고요함을 깨운다.


도무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어디를 봐도 한편의 그림이다. 굳이 갤러리에 갈 필요가 없다. 세상이 온통 그림인데 어딜 갈까. 행복한 미소가 절로 나는 이 봄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 찰칵하는 순간 고개를 드니 거기도 그림이다. 이보다 넉넉함이 있을까. 세상이 모두 내 앞에서 그 아름다움을 연출하는데 무엇이 더 필요할까.


훌륭한 악기들의 오케스트라 하모니가 이보다 아름다울까. 매혹적인 오케스트라 하모니 선율의 아름다움 뒤엔 연주자의 피나는 연습과 호흡이 함께 느껴지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작품의 배경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도 그대로 편안하고 아름답기만 하다.


4월의 자연이 다채로운 봄의 향연을 보고 있는 듯하다면, 추운 겨울의 터널을 뚫고 드러낸 3월의 자연은 자못 설레임이었다. 그 설레임의 3월 어느 날, 나무토막처럼 메말라있던 무기물에 불과했던 그 가지들이 스스로 생명을 불어넣고 있었다. 물오른 붉은 가지로, 녹색 가지로 생명을 틔우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새 생명들은 살아있음을 색으로 물오름으로 알리고 있었고 우린 그 몸짓을 오감으로 읽어내어 다가올 세상을 예감하고 있었다. 많은 사물들이 똑같이 그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그 어떤 사물도 매 순간 그대로인 적은 없었듯이 말이다. 자연은 그렇게 매 순간 변화를 거듭하므로 우리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 끝없이 소유하려는 우리들. 어찌 보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씨앗도 이 소유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소유욕의 출발은 살기 위한 본능에서 비롯되었지만 이후 그 욕망의 확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가 되어 버렸다. 그 많은 소유물들이 자신에게 진정 필요한 것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소유물의 정도는 상대적 부의 경쟁에서의 전유물과도 같다. 그러다가 결국 그 전유물들은 제대로 쓰이지도 못한 채 버려지기도 하고 과용되기도 한다. 자연은 그렇게 버려지는 것들조차 수용하고 다시 자연으로 순환하게 한다.


유한한 자원을 토대로 한 인간 삶에서 이처럼 생존을 위해 시작된 소유욕은 생존에 대한 불안과 강박증으로 나타나고 결국에는 재화의 고유 속성인 필요성과 무관하게 무한히 쌓아두려는 습성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한 강박증과 소유욕 사이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하면서도 정작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물자와 시간 할애는 도외시한다. 우리가 오늘 치열하게 경쟁하고 온갖 전략을 동원해 많은 것을 이루고 가지려는 노력들은 이러한 강박증과 소유욕 사이의 행위들이다.


우리는 이런 소유욕에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강박이라는 스트레스를 치유하겠다며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곳(혼자만의 시간, 자연 그런 곳)을 찾는다. 소유욕과 치유라는 상반된 과정은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임에도 우리는 절묘하게 두 지점을 오가며 위안받고 있다. 과연 이 모순된 행동은 어디로부터 온 것이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온갖 생명체들이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다채로운 색채와 분위기로 그 존재를 연출해 내는 자연을 대할 때 우린 풍요로움을 느낀다. 내가 소유하지 못한 많은 것이 그곳에 있지만 우린 그것들을 소유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평온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즐길 뿐이듯 우리를 평온함으로 이끄는 것들은 소유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소유하려는 욕망이 들게 두지 않는다. 간혹 그 모습을 본떠 그럴듯한 미니어처(정원)를 꾸미기도 하지만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물에 대한 물리학적 개념이라는 것은 인간의 인식능력의 한계를 반영하는 개념일 뿐 완벽한 그 어떤 개념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그 종족을 유지해 나가기 위한 독특한 소통의 방식일 뿐이었다고 할까. 아마도 그 소통을 위한 방식(정의)이 일정치 않다면 이미 모여 사는 것은 불가능해졌을 것이다.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 살아가는 고독한 존재가 되었을 뿐.


그래서 우린 우리의 감각으로 인식한 비슷한 모습들을 모아 마치 하나의 모습인양 정의하고 말았다. 우리의 인식 밖의 영역은 아예 배제해 버리기도 한다. 인간의 종족 유지가 절대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인간사회가 선택한 어쩔 수 없는 표현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사실적 표현이 아니라도 사실인양 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물리학자들이 이 인간 세계의 소통 원칙을 깨고 있었다. 양자의 존재처럼 있기도 없기도 한 존재의 상황을 양자역학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이 가진 인식의 한계를 넘는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다. 그동안 물리학 개념은 인간이 가진 감각의 개념 안에 포착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개념의 확대를 위해 미시·거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정밀 기기들이 동원되었고 무던한 실험을 거듭했다.


그런데 갑자기 눈에 보이기는 하지만 한자리에 있지도 않고 규칙성의 움직임도 아닌 입자가 시야에 들어온다. 도대체 이를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많은 학자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결국 그들은 양자라는 것이 원래 그런 입자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새로운 인식의 방식을 채택한다. 즉 인간의 시선이 개입되는 순간 그 물질은 변해버린다는 물질의 존재 형식을 찜찜하지만 받아들여 양자역학이라 명명했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의 인식 체계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오만 속에서 많은 진실의 세계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언가 정의하는 순간 우린 그 정의된 한계 밖으로 나오기 쉽지 않게 되고 결국 많은 외적 세계를 잃게 된다. 우리가 정의한 한계 내에서 보이는 것만을 진실이라 간주한 채 살아야 하는 인간의 숙명 때문에 희로애락의 인간 역사도 생성되는 것이 아닐까. 무언가 구체화하기 위해 집착해야 하고 또 한계 지워야 하는 숙명 때문에 인간은 이 광활한 우주의 공간에서 물리적 실체와 인식의 한계 사이에서 인지부조화를 겪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출처 : 한겨레 사이언스온
출처 : 한겨레 사이언스온(슈뢰딩거의 고양이)


아직 바람에 찬 기운이 있긴 해도 햇빛은 따사롭다. 다소 늦게 봄을 시작한 가지들에도 꽃망울들이, 새순들이 올망졸망 올라오고 있다. 얼른 보아서는 보이지 않는다. 가까이 아주 가까이 가야 보여준다. 내가 이렇게 세상에 나왔다는 것을. 세상 그 무엇보다 예쁘다는 것을.


어제도 오늘도 어수선한 세상사로 좌절하고 흥분하고 실망하면서도 희망을 생각하는 우리와 닮았다. 그들에게도 그 얼마나 풍파가 많았을 것인가. 추위에 바람에 가뭄에 벌레들의 침입에, 밟히고 시달리면서도 햇살 좋은 날 모습을 드러내며 방긋 웃어준다. 어찌 예쁘지 않을 수 있을까.


때론 끝없는 갈등의 나날들을 내려놓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을 때가 있다. 너무 많은 걸 가져서 피곤하게 시달리며 사는 인간의 지위를 양도하고 싶어 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은 항상 이렇게 얘기한다. ‘끝이 없는 길을 가야 하고 결코 포기해선 안 된다. 희망의 끈을 놓아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문득 '왜 그래야 하는데?'라고 되묻고 싶어진다. 비정상으로 가득한 인간 세상을 끝없이 정상으로 돌려놓아야 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게 인생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인생의 가치를 인정하란다. 마치 산 아래로 떨어지는 거대한 바위를 끝없이 정상으로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신화의 시지프스처럼.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때로 몹시도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다. 이조차도 오랜 관습의 산물로 학습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 한계에 갇혀 오랫동안 오히려 진리를 외면해온 것은 아니었을까.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한 치의 어색함 없이 이 봄의 향연을 이끌어내고 있는 대자연이 문득 내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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