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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24. 2018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타자들로서 존재한다

피란델로: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Uno, nessuno e centomila)>, 루이지 피란델로, 김효정 옮김, 문학과 지성사



   데카르트가 의식을 담지한 자발적인 주체를 내세워 신 중심의 철학을 타파하고 인간 중심의 철학으로 근대를 열었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칸트가 세계를 구성하는 주인공으로서의 적극적인 주체를 확립한 뒤로, 다양한 근대 철학의 거두들을 거치면서 자기 동일성을 스스로 확립하며 자연뿐만 아니라 심지어 타자까지도 대상화하는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존재로서의 이성적 주체가 정립되었다. 반면에 이런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주체를 파괴하고자 했던 니체의 과업을 이어받은 현대 철학은 주체에 대한 다양한 해체 작업을 시도했고 그 결과 근대의 주체는 이 시점에 와서는 점차적으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 주체 해체의 시도는 주체에 무의식을 도입하여 분열된 주체의 근거를 제공했던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과 기표와 기의의 미끄러짐을 가능케 했던 소쉬르의 언어학, 그리고 유클리드 세계관을 흔들어버린 현대 물리학과 현대 수학 등의 여러 사상과 학문의 도움을 받아 포스트 모던이나 구조주의, 해체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에 의해 수행되었고 그 결과 이제는 가히 주체 해체의 시대라고도 불릴 만한 사조의 한 시대가 저물어가는 듯하다. 


   하지만 소위 말하는 
주체 해체의 다양한 철학적 방식과는 다른 방식으로 주체를 완전히 해체해 버리는 소설이 있다. 그것은 바로, “루이지 피란델로”라는 이태리 작가가 쓴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김효정 옮김, 문학과지성사>이다. 이 소설은 총 여덟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소설의 주인공 “비탄젤로 모스카르다”의 여정 전체가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주체에 대한 비이성적 해체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물음표를 치는 것으로 시작해서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나라는 주체를 해체하며 종국에는 주체란 것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극단까지 나아간다. 현대 철학의 최극단의 해체주의자보다 더 극단적이고 절대적인 자기 해체로 이 소설은 마무리되지만 이 소설에서의 주체 해체는 주체의 분열을 의미하지 않는다. 아예 처음부터 분열될 수 있는 주체 자체가 없기에 주체라는 개념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는다. 이런 해체는 흄의 주체 해체와 비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 흄은 주체를 관념과 인상의 다발로 격하시킴으로써 애초에 항구적인 주체란 것 자체가 없다고 선언해 버린다. 피란델로의 이 소설 역시 항구적인 주체란 것 자체가 없으며 그것은 타인들이 부여한 형식일 뿐이라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서 이 소설은 수많은 '나'라는 타인들을 수용하는 무의미한 육체만을 남길 뿐이지만 이러한 해체 과정 자체가 타자의 존재를 자연스럽게 정당화하고 있으며 동양철학의 물아일체와 무위자연 사상에까지 이른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점들을 가볍게 상기해 두고 이제부터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주인공 모스카르다의 여정을 따라가 보자.





   “비탄젤로 모스카르다”, 평소에 그를 젠제라 부르는 아내 디다와 함께 리키에리라는 마을에서 유복한 가정을 꾸리고 사는 스물여덟 살의 평범하고 가정적인 남자다. 아버지가 물려준 은행을 소유하고 있지만 그 은행은 평소에 그를 귀여운 비탄젤로라 부르는, 아버지의 친척인 콴토르초와 그의 친구 피르보가 전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며 은행 대표로서의 필요성에 따라 가끔씩 은행에 직접 가서 서류에 서명하는 일 외에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무위도식의 삶을 살고 있다. 그의 이런 삶은 어릴 때부터 그에게 주어진 게으름과 끈기 부족에서 기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생각이 많아서 주저하는 그의 성격이 더 큰 요인이었다. 아버지는 그에게 이런저런 많은 길을 제시했지만, 그리고 충실하게 그 길에 들어섰지만 길의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조그마한 걸림돌에도 그는 멈춰 서서 고민과 상념에 빠져 그 주위만 맴돌다 결국 포기하고 마는 삶을 반복했다. 마지막으로 아버지는 손주를 빨리 보겠다는 소망으로 그를 일찍 결혼시켰지만 그 소망마저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을 보면서 그는 자신의 코가 왼쪽으로 약간 휘었다는 사실을 아내 디다를 통해서 깨닫게 된다. 아내의 말로는 코뿐만 아니라 그의 눈썹은 곡절 악센트(^^) 모양이었고 한쪽 귀는 다른 쪽보다 더 튀어나왔으며 새끼손가락이 약간 휘었고 오른쪽 다리가 왼쪽보다 더 굽어 있단다. 그는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자신의 신체가 지극히 정상이라고 생각하며 삼십 년 가까이 살아왔다. 하지만 남들에게 그는 코가 휜 모스카르다였고 이런저런 신체적 결점을 지닌 모스카르다였다. 그는 그때까지 속으로 상상했던 자신이 남들에겐 그가 아니었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 지금까지 나라고 믿었던 내가 남들에겐 내가 아니었다면, 나는 누구였을까? 그는 이런 원초적인 물음에 빠지기 시작했고 이 물음은 찻잔 속의 태풍이 되어 그의 삶 전체를 뒤흔들기 시작한다.


   모스카르다는 지금까지 자신을 잘못 알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아는 ‘나’는 진정한 내가 아니었고 타인들의 눈에 비치는 그의 모습이 제대로 된 ‘나’였으며 타인들이 보는 내가 진정한 ‘나’일 것이리라. 하지만 타인들이 알고 있는 그 진정한 ‘나’를 모스카르다는 모른다. 자신에게 그렇게 친숙한 자신의 신체 – 코와 귀, 손, 다리조차 모르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 ‘나’는 영원히 자신과 함께 있는 이방인일 수밖에 없다. 그는 진정한 자신으로 존재하고 있을 그 이방인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모순은 자기 스스로 그 이방인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남들은 그들의 눈을 통해 표현되는 그를 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그를 표현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볼 수 없고, 자신의 육체 앞에 나설 수도 없으며 자신이 보는 남들의 몸처럼 자신의 것을 볼 수 없다. 그 이방인은 타인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으며 진정 보기를 원한다면 그 자신이 타인이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거울을 통해서라면 시도해볼 만하지 않을까? 하지만 거울 앞에 섰을 때 그는 갑자기 자신이 정지되는 걸 느꼈고 모든 자발적인 것이 사라지면서 종국에는 자신의 몸짓은 허위나 위선 같다고 느꼈다. 거울 속의 이미지는 살아있는 내가 아니라 죽은 것이라고 느꼈고 결국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난 내가 살아 숨 쉬는 것을 볼 수 없다!”


   그래도 그나마 거울이 유효했다. 며칠 후 그는 친구 피르보와 담소를 나누며 걸어가다 길가에 진열된 거울 속에 있는 자신과 갑자기 마주하게 된다. 마주한 그 찰나의 순간에 이어 곧바로 어떤 정지감이 따랐고 자발적인 것이 사라지면서 그때부터 생각이라는 것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정지감이 따르기 직전의 그 찰나의 순간, 그가 자신을 생각하지 않을 때의 그 순간에 직감한 거울 속의 그 이미지가 바로 이방인일 거라 느꼈다.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찰나의 순간에만 볼 수 있고 다른 때는 살아 있는 모습을 볼 수 없는 그 이방인이 바로 자신은 볼 수 없고 남들만 보고 알 수 있는 이방인 – 진정한 ‘나’일 것이리라. 그때부터 그는 그 이방인을 추적하겠다는 가망 없는 계획에 몰두했고 혼자 있기를 시도했다. 혼자 있기 – 그가 말하는 혼자 있기는 흔히 남들이 말하는, 즉 “옆에 어떤 이방인도 없이 자기 자신과 함께 있는” 혼자 있기가 아니라 “내가 없고 또 옆에 아무도 없이” 혼자 있기를 의미했다. 다시 말해 “나 없이” – 내가 이미 알고 있거나 안다고 믿었던 그런 내가 없이 어떤 이방인 – 내가 아닌 나 자신과 함께 있기를 의미한다. 이는 곧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나를 보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 아니었다. 며칠을 기다린 끝에 아내가 외출을 했고 그는 방 안의 거울 앞에 눈을 감고 섰다. 생각을 없애려고 무지 애를 쓰면서 눈을 떴지만 그 이방인은 보이지 않았고 동원 가능한 모든 표정을 짓고 다양한 인상을 쓰면서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절망감에 지쳐 체념으로 얼굴이 일그러져 갈 즈음의 잠깐의 순간, 그는 무감각해지면서 그런 무감각 속에서 자신의 정신이 육체와 분리되는 것을 거울 속에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를 보았다! 


   하지만 거울 속의 ‘그’는 자신이 그렇게 보고자 했던 그 이방인이 아니었다. 어느 누구도, 아무것도 아니었고 단지 누군가가 잡아주기만을 기다리는,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한낱 가련하고 무기력한 육체일 뿐이었다. 모스카르다가 보고자 했던 진정한 ‘나’로서의 그 이방인은 존재하지 않았고 그저 무의미한 육체 그 자체만 거기에 있었다. 그렇다면 그 육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그가 보고자 했던 그 이방인은 오로지 한 명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한 명이 아니었다. 그 육체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서 수 십, 수 만의 모스카르다가 취할 수 있는 단순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았다. 이 육체는 자신이 원하고 느꼈던 만큼 되기 위해 취할 수도 있고 자신을 보는 다른 수많은 타인들이 그것에 실체를 부여해 취할 수 있는 수단이었고, 하필이면 모스카르다라고 불리는 수 십, 수백만 명의 이방인들이 그 육체를 통해서 존재할 것이다. 결국 그 육체는 스스로에겐 아무것도 아니고 그 누구도 아닌 만큼 한줄기 바람에도 오늘 재채기를 할 수 있으니 내일은 사라져 버릴 수도 있는 그런 존재였다. 따라서 그의 결론은 이렇게 정리될 수 있다. “나는 타자로서 존재한다. 나의 육체는 수많은 타자들이 거쳐가는 장소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제부터 피란젤로의 주체 해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나라는 자아는 모스카르다가 만들어 자신의 육체에 부여한 실체일 뿐이다. 하지만 이 자아는 모스카르다만이 알 수 있는 실체일 뿐 타인들에겐 알려지지 않은 존재다. 대신에 디다는 그의 육체에 실체를 부여하여 모스카르다 자신은 알지 못하는 그녀만의 젠제를 형성한다. 콴토르초는 그의 육체에 귀여운 비탄젤로라는 실체를 부여하며 이 귀여운 비탄젤로는 그도 디다도 알 수 없는 콴토르초만의 모스카르다가 된다. 결국 육체란 것은 비어있는 동시에 수많은 타인들이 부여한 만큼의 이방인들이 거쳐가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세 명의 사람 A, B 그리고 C가 한 방에 있다고 치자. A가 독자적인 한 사람인가? 피란델로는 아니라고 한다. B는 자신의 관점에서 A를 본다. 따라서 B를 위한 A가 있다. C 역시 자신만의 기준으로 A를 볼 것이며 C를 위한 A가 있다. 물론 A 스스로 자신이라 생각하는, 자신을 위한 A 또한 있다. 이렇게 A는 세 사람이 된다. A라는 육체는 있지만 그것은 A, B, C 세 사람을 위한 A라는 실체가 개별적으로 공존하게 될 수단일 뿐이다. 그리고 세 명의 A는 A 자신에게 모두 타인일 뿐이기에 A는 타인으로서 자신의 외부에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B를 위한 B, A를 위한 B, C를 위한 B, 그리고 C를 위한 C, A를 위한 C, B를 위한 C가 존재할 것이다. 따라서 그 방에는 총 9명의 이방인들이 존재하게 된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게 된다면… 수십, 수백만 명의 그들이 각각 존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각 개인은 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십만 명인, 그래서 아무도 아닌 존재가 된다. 따라서 모스카르다와 디다가 넘치는 애정으로 서로 껴안고 있을 때에조차도, 끔찍하겠지만 두 쌍의 이방인이 서로 껴안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여자에게만 이방인이었던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 타인이 껴안고 있는 그 육체 안에서 이방인일 뿐이다.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 역시 마찬가지다. 피란델로는 세상의 모든 것들은 매 순간 변하며 잠시도 정지하지 않고 지나가 버린다고 주장한다. 그러한 관점 하에서 피란델로는 우리의 현실도, 우리 자신도 매 순간 다르게 구성된다고 본다. 여러분들은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현실이 남들 모두를 위해서도 똑같이 존재하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현실은 남들이 보기엔 한 줌의 미풍에 순식간에 흩어져 버릴 연기보다 견고하지 않다. 우리의 현실은 사실 각자가 만들어내는 타인들로 구성된 현실이다 이 현실을 채우고 있는 나와 너, 아니 A와 B를 보자. 그 속에서 A가 B에게 말할 때 A는 그 말에 자신의 의미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B는 A의 말을 받아들일 때 그 말에 자신의 의미를 가득 채운다. 그 결과, A와 B는 서로 이해했다고 믿었지만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서로의 의미를 각자가 채우듯 각자는 자신의 방식으로 현실을 가득 채운다. 하지만 그 방식은 상대는 모르고 또 결코 알 수 없는 자신의 방식으로 규정된 현실이다. A의 현실은 A 안에서 A를 위해 존재하며 그것이 A가 자신에게 부여한 현실이지만 B는 B만의 현실이 존재하며 이 두 개의 현실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현실이란 것은 바로 이런 식으로 각자가 구성한 현실이다. 인간들은 마치 건물을 건설하듯 현실을 건설하며 이때 자기 자신조차도 재료로 취한다. 사람들은 스스로 변하지 않은 자기라는 동일성을 유지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일 분 전에 자신은 다른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하지만 그것은 편견일 뿐이다. 오늘 여러분은 어떤 방식을 고집하다가 내일은 다른 방식을 고집하게 된다. 어떤 식으로든 A가 자신을 건설하지 않는다면 A 자신을 인식할 수 없다. 동시에 B의 방식대로 A를 건설하지 않는다면 A는 B를 인식할 수 없다. A가 B를 위해 갖고 있는 현실은 B가 A에게 준 형태 속에 있다. 그러나 그것은 B를 위한 현실이지 A를 위한 현실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B가 A를 위해 갖고 있는 현실은 A가 B에게 준 형태 속에 있지만 그것은 A를 위한 현실이지 B를 위한 현실이 아니다. 따라서 A는 계속해서 A를 건설하고 B를 건설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현실에 안녕을 고해야만 한다. 우리는 곧 그것이 우리의 환영일 뿐임을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타인들의 시선은 내가 아닌 나라는 형식을 나의 육체에 덧씌우고 자기 방식대로 판단한다. 그렇기에 디다의 멍청한 젠제나 콴토르초의 귀여운 비탄젤로라는 이방인이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서 모스카르다는 어떤 결심을 하게 된다. 자신에게 존재하는 타자들을 제거하기로 한다. 디다의 젠제를, 콴토르초의 비탄젤로를, 무엇보다도 리키에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고리대금업자 모스카르다를 제일 먼저 없애기로 한다.


   그의 아버지는 고리대금업자들과 경쟁하면서 공격적으로 그들의 고객을 자신의 은행으로 끌어들였으며 그런 연유로 아버지는 고리대금업자라고 불렸고 후에 모스카르다마저 그렇게 인식되었다. 그는 고리대금업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지만 아버지의 은행을 상속받으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고리대금업자 모스카르다가 되었다. 원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육체는 고리대금업자 모스카르다라는 이방인의 실체를 부여받았다. 아내 디다에겐 그녀의 멍청한 젠제로서의 모스카르다였고 콴토르초에겐 귀여운 비탄젤로로서의 모스카르다였지만 리키에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는 고리대금업자로서의 모스카르다였다. 그는 우선 고리대금업자 모스카르다를 제거하기로 했고 그것을 위한 희생양으로써 마르코 디 디오 부부를 선택했다. 한때 인정받는 석공이었던 마르코는 추한 사건에 연루되어 감옥에 갔다 온 뒤로 이상하게 변해 버렸다. 그 부부는 가난했으며 놀라운 발명품을 만들어 백만장자가 되겠다는 허황된 꿈을 습관처럼 만들어 버렸다. 그런 연유로 그들은 모스카르다의 아버지에게 조금씩 돈을 받아갔으며 은행을 물려받은 모스카르다 역시 그들에게 시혜를 베풀어 자신 소유로 된 집을 그 부부에게 무상으로 대여해 주고 있었다. 모스카르다는 공증인 스탐파의 사무실로 가서 그 집을 자신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공증서를 요구했다. 스탐파는 공증서를 위해 몇 가지 서류가 필요하다고 했고 그 서류들은 모스카르다의 은행에 있었고 이제 역설적으로 그는 그 서류들을 훔치기 위해 자신의 은행으로 갔다. 은행에서 그는 괜한 시비를 걸어 피르보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콴토르초에겐 집세를 내지 않는 마르코 부부를 그날 당장 그 집에서 쫓아내라고 처음으로 “명령”했다. 그리고 서류 보관실을 난잡하게 뒤져 원하던 서류들을 훔쳐 스탐파의 사무실로 돌아갔다.


   비가 무지 쏟아지는 그날 저녁, 동원된 용역들이 마르코 부부를 집에서 내쫓기 시작했다. 몰려든 구경군들 사이로 가재도구들이 내동댕이쳐져 나뒹굴고 있었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모스카르다를 욕하기 시작했다. 경찰과 수행원을 대동한 모스카르다는 가까이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모스카르다의 이런 행동에 군중들은 분노했고 ‘고리대금업자’라는 비난과 함께 “죽여!”, “타도하자!”라고 소리치며 그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위기가 닥쳐오던 순간, 검은 옷을 입은 키 작은 청년이 가재도구들 사이의 작은 책상 위로 올라서서 외치기 시작했다. 공증인 스탐파 씨를 대신해서 온 사람이며 모스카르다씨가 마르코 디 디오씨에게 어디 어디에 위치한 집과 1만 리라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그 사이 모스카르다는 자신이 선물한 그 집으로 먼저 가서 숨었다. 그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마르코와 사람들은 그 집으로 몰려갔고 마르코는 자신의 소유가 될 그 집 안에서 모스카르다를 발견한다. 마르코는 모스카르다의 멱살을 쥐고는 이렇게 말했다. “미쳤군, 미쳤군, 미쳤어!”. 다른 구경꾼들도 똑같이 말했다. “미쳤군, 미쳤군, 미쳤어!”


   그의 목표는 분명했다. 고리대금업자 모스카르다 죽이기! 이를 통해서 그는 사람들이 평소에 '그'라고 믿었던 대로 존재할 수 없다는 걸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 난리 후 그는 다시 디다의 멍청한 젠제가 되어 그녀의 치마폭에 몸을 맡겼다. 디다는 그가 저지른 그 난리를 하나의 치기로 간주했다. 그녀는 어린애를 달래듯 그를 위로했고 강아지의 목줄을 쥐어 주며 산책을 다녀오라고 했다. 고분고분한 그녀의 젠제는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섰다. 산책 중에 모스카르다는 건물이 헐리고 부지만 남은 공터 담벼락에 앉아서 자신이 벌인 그 사건에 돌이켜보며 또다시 상념에 빠지게 된다. 그 상념은 구성되는 현실과 구성되는 나라는 자신의 깨달음을 단순히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드는 생각의 발전으로 그를 이끌었다. 여기에서 타인의 시선이라는 요소가 개입하는데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대로 자신의 방식으로 상대의 육체에 부여되는 형식이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이런 타인들의 시선이 없다면 내가 나를 어떻게 보았는지 말할 수 있는, 다시 말해 자신의 육체와 사물들을 타인들이 볼 것이라고 내가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있는 나를 위한 시선은 정작 자신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따라서 이런 타인들의 시선이 없다면 나의 눈은 자신이 보았던 것을 정말로 알 수가 없었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타인들의 시선이 우리가 보는 현실을 우리에게 형성하는 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는 것을 우리는 더 이상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다고 믿었던 의식은 사라진다. 왜냐면 그 의식이란 것은 우리들 속에 있는 타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혼자 있다고 느낄 수 없다. 생각이 이 지점까지 다다른 후에 모스카르다는 타인의 시선을 받지 않고 홀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무엇인가에 대한 공포를 예감하고 벌떡 일어섰다. 그것은 헤어날 수 없는 심연에 자리 잡게 될 고독에 대한, 조만간 직접 경험하게 될 공포였다.


   산책에서 돌아왔을 때 콴토르초가 와 있었고 모스카르다가 벌린 그 난리에 대하여 디다와 심각한 논의를 하고 있었다. 이 시점에서 모스카르다는 다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콴토르초의 비탄젤로와 디다의 젠제 죽이기! 콴토르초의 비탄젤로는 은행 업무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며 그렇기에 은행을 전혀 모르는 바지 사장으로서의 모스카르다였다. 하지만 그날의 귀여운 비탄젤로는 은행 관련해서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고 생떼를 쓰며 심지어는 자신의 계좌를 따지면서 콴토르초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점점 흥분하던 모스카르다는 종국에는 은행 소유주로서 자신의 은행을 처분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린 콴토르초는 은행은 그 혼자만의 소유가 아니라 돌아가신 그의 아버지와 공동 소유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장인을 비롯하여 여러 투자자들이 있으며 은행을 처분함으로써 입을 여러 사람들의 손해나 디다의 앞으로의 삶 따위를 들이밀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반박을 애원하듯이 했지만 그날의 귀여운 비탄젤로는 막무가내로 자신의 돈을 모두 인출하겠다고 원하고, 원하고, 또 원한다고 소리쳤다. “하지만 그 이유는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렇게 갑자기 결정한 이유가 뭔가?” 답답한 콴토르초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에 그는 바로 대답할 수 없었다. 애원하는 콴토르초와 놀라서 초조해하는 아내. 그들에게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 진정한 이유를 설명한다면 두 사람 모두 그를 진짜로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주저하는 틈을 비집고 들어온 디다는 달래듯 그의 얼굴을 감싸고 우스꽝스러운 명령조로 이 상황을 끝내라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녀는 그렇게 다시 그녀의 젠제를 소환했고, 순간 그는 눈에 초점을 잃은 채 디다의 팔목을 잡고 흔들면서 소파로 밀쳐 버렸다. 그리고 외쳤다. “당신도 내가 아닌 당신의 젠제로 끝내라고! 내가 아니지. 내가 아니란 말이야! 그런 꼭두각시는 끝이야! 난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싶어. 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싶다고!” 콴토르초를 바라보면서 “알겠어?” 그리고 그는 거실을 나와 버렸다.


   그는 숨을 거칠게 내쉬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내에게 했던 격한 행동에 놀라 한숨이 나왔다. 반면에 그는 ‘어떤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현재 그가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사람, 이제 막 그가 그렇게 느꼈던 사람. 마침내! 그는 더 이상 젠제가 아닌 어떤 타인이었다. 그는 바로 이것을 원했다, 하지만… 그가 되고자 했던 타자로서의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디다는 그녀만의 젠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콴토르초 역시 귀여운 비탄젤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장인도 마찬가지다. 그가 그렇게 원했던 그 타자는 단순히 그들에겐 미쳐버린 젠제이자 비탄젤로이며, 자신이 해체했던 고리대금업자 마스카르다는 미쳐버린 고리대금업자로 남을 것이다. 그 타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다른 모든 타자가 배제된 혼자만의 타자였고 종국에는 끝없는 고독의 냉혹함과 영원성을 동시에 견뎌내야 할 그런 ‘나’였다. 그것은 하나의 공포였다. ‘내가’ 결코 나의 것이 될 수 없던 감각과 가치를 남들을 위해 가지고 있었고 그렇게 타인들 외부에 있는 내가 어떤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이런 공백 상태와 고독에 대해 느끼는 고통을 의미한다면, ‘나’라고 말하는 게 무슨 가치가 있을까?


   다음 날 그를 찾아온 장인은 그가 미쳤다는 것을 한번 더 확인하고 돌아가 버렸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는 자신이 그렇게 되기를 바랐던 이방인에서 원래의 그로 돌아왔다. 은행과 관련된 사람들이 개입해서 다시 아내와의 관계를 회복시켜 주기를 바랐다. 그들과의 직접적인 장애물인 은행을 처분하겠다는 자신의 고집만 버린다며, 그리고 아내를 밀친 것에 대한 진지하게 사과만 한다면 다시 그녀의 젠제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전혀 다른 이방인이 되었던 순간 느꼈던, 헤어날 수 없을 공백 상태와 심연의 고독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아내의 친구인 안나 로사가 수녀인 숙모가 기거하는 수녀원으로 그를 초대했다. 이전에 디다가 그녀를 집으로 초대해서 몇 번 본 적은 있지만 그는 아내의 친구라는 존재에 부담을 느껴 그녀의 시선을 피했던 터였다. 어두컴컴한 수녀원에서 그녀를 만났을 때 계단을 올라가던 그녀는 가방을 떨어뜨렸고 가방 속에 있던 총이 떨어졌고 그 충격에 발사된 총알은 그녀는 다리를 다치게 만들었다. 급하게 그녀를 업고 그녀의 집으로 옮겼고 의사와 간호사를 불러 치료를 했다. 하지만 그 소문은 삽시간에 이상한 쪽으로, 즉 우리가 충분히 억측할 수 있는 불륜이나 치정 따위로 와전되어 퍼졌다.


   그 소문의 와전은 디다가 근거를 마련해 준 것으로서 모스카르다는 이전부터 안나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안나가 방문할 때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 그를 보고 디다는 그것을 사실로 만들어 버렸다. 물론 반은 진실을 담고 있다. 모스카르다는 전혀 아니었지만 디다의 젠제는 그랬다. 그래서 모스카르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는, 즉 디다의 젠제는 안나를 은밀히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에 안나 역시 디다와의 교우를 통해 그를 상상했고 그에게 호감을 느꼈던 터였다. 그러던 차에 디다가 안나에게 미쳐버린 자신의 남편에 대한 하소연과 더불어 모스카르다를 대상으로 모의되고 있는 모종의 음모를 털어놓았을 때 안나는 위기에 빠진 그를 도와주기 위해서 그를 초대했던 것이다. 그 음모는 은행 방어를 위한 미친 모스카르다 만들기였다. 디다가 안나에게 전하기를, 디다 자신을 포함하여 피르보, 콴토르초와 장인은 그가 미쳤음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증거를 이미 수집했으며 은행 직원들과 심지어 자신이 집을 선물했던 마르코까지도 증인으로 나선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제 적이 되어 은행 방어에 돌입했다. 미치광이 모스카르다를 증명함으로써 은행 폐점을 합법적으로 저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에 안나는 그 음모를 방어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해 줄, 리키에리에서 커다란 신뢰와 존경을 받고 있는 파르티나 추기경을 소개해 주었다. 추기경이 제시한 방안은 이것이었다. 모스카르다의 뜬금없는 은행 폐점 시도가 그가 미쳐서가 아니라 고리대금업자로서의 모스카르다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 따른 행위였음을 리키에리의 존엄인 추기경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보증해 준다는 것이다. 대신 추기경은 하나님께 봉헌할 집 한 채를 지을 비용을 요구했고 관련 처리를 전담할 대성당의 주교좌 참사 회원이자 봉헌 수도사회 회장인 클레피스를 소개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권리를 박탈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승리를 확신하며 주교 관저에서 나왔다.


   클레피스가 일을 진행하는 동안은 모스카르다는 침대에 누워 있어야만 하는 안나 로사의 말동무가 되어 주는 일밖에는 별 다른 할 일이 없었다. 매일 그녀의 집을 방문하면서 그는 그녀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안나 로사는 오래 지속되거나 한 곳에 정착을 요하는 일은 참지 못하며 평범한 것은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의 성격이 알 수 없는 이유로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자 하는 그를 평범하지 않다고,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느끼게 했을지도 모를 것이며 그녀 자신과 통하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했을 것이다. 모스카르다에 대한 안나의 관심은 은근하고도 새침한 유혹으로 표현되었다. 스물다섯의 꽃다운 나이의, 흘러내리는 머리카락과 붉은 입술, 누워 있을 때 그녀의 몸매를 더욱 풍만하게 보여주는, 얇은 이불이 만들어내는 도드라진 윤곽… 그녀가 의도적으로 그런 것들을 부각한다는 사실을 그가 점차 인지해 가던 어느 날 아침, 모스카르다는 손거울을 들여다보며 두 눈이 악동처럼 반짝였음에도 동정을 머금은 듯한 미소를 짓는 그녀를 보았다. 마치 그를 위해 방금 지어낸 듯한 그 미소가 거울 속의 미소와 일치하는지를 묻는 그녀의 고집스런 질문에 반감을 느낀 모스카르다는 자신이 겪었던 거울의 비밀, 그 처절한 고독, 한계상황으로 그를 밀어붙이는 내면의 고통을 토로하고야 말았다.


   생명은 쉼 없이 움직이기 때문에 자신을 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며 거울 속의 그녀는 그것을 응시하고 있는 자신의 생명을 잠시 중단시킨 결과이기에 거울이든 사진이든 그 속의 이미지는 이미 죽은 것이라는 점을, 반대로 현재 그녀가 살아있는 이유는 그 시점에 거울을 보지 않기 때문이며 따라서 스스로를 인식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사실과 사람들은 타인들이 자신을 보는 것처럼 결코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을 보려고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그렇기에 본질적으로 자신을 인식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사실을......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이런 모든 정신적인 고통을 털어놓았을 때 안나는 그 고백에서 지울 수 없는 매력을 느낀 동시에 몸서리를 치며 때로는 증오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확실한 것은 그녀가 비상한 관심을 갖고 그를 바라보았다는 사실이고 그 관심은 모든 것이 불확실한 모스카르다의 생각 속에 비친 그녀의 모습처럼 당혹스러운 것이었다. 그녀가 모스카르다에게 원했던 어떤 사람, 하지만 그에게는 진정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기 위해 그가 가진, 또 앞으로 가질 수도 있는 모든 것을 거부하느라 힘들어하는 그의 열망에 그녀는 동정심을 느꼈으며 며칠 동안 그녀에게 했던 그의 모든 말에 기묘하게 매료되는 그 순간 본능적인 두려움도 동시에 느꼈으리라. 그렇게 동반되는 다층의 감정이 그녀를 파국적 행동으로 이끌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그를 자신에게로 끌어당겼지만 침대 베개 밑에서 그녀가 총을 꺼내는 것을 모스카르다는 보지 못했다. 총이 발사되고 그는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스러졌다. 다행히 그는 살아났으나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안나는 재판을 받게 되었고 모스카르다는 그녀의 무죄를 주장했다. 클레피스는 이 사건으로 인해 일이 꼬여 버렸으며 이젠 집 한 채가 아니라 추기경의 보증으로 인해 얻게 될 전 재산을 구빈원을 짓는데 봉헌한다면 후회와 희생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한 모스카르다 역시 구빈원에서 그곳의 규칙에 따라 생활해야 한다는 조건도 덧붙였다.


   회복기에 들어선 그는 들것에 실려 병원에서 집으로 옮겨졌다. 초록색 모포를 무릎에 두르고 창가의 소파에 앉아 따스한 봄날의 햇살을 쬐는 동안 그의 마음은 평온했으며 감미롭고 공허한 꿈에, 술에 취한 듯 도취되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안나가 총을 쏜 결정적 이유를 알고자 몸소 그를 방문한 판사에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반복한다는 것은 꼼꼼한 그 판사가 쌓아온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무너뜨릴 거대한 폭풍우가 될 것이기에 그는 대신 초록색 모포를 보여주며 조용히 이렇게 물어보았다. 미안하지만, 정말 이 초록색 모포가 아름답지 않습니까? 완치된 후 그는 클레피스와의 약속대로 모든 재산을 봉헌하고 구빈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그는 구빈원의 규율에 맞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청빈한 생활을 이어갔다. 이제는 여전히 모스카르다라고 불려도 더는 신경 쓰지 않을 그는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었다. 더 이상 거울도 보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잊어버렸고 모든 상념과 기억을 망각 저편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육체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어떤 타인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의지가 아니기에 그는 여전히 모스카르다라 불리겠지만 이름이란 것도 이젠 그에게 의미가 없었다. 이제 그는 어떤 타인, 정의할 수 없는 나라는, 스스로 되기를 원했던 타인마저도 거부한다. 그런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은 공허와 고독을 견뎌야 하는 또 다른 삶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 타인마저 거부하는 것이 자신을 인식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라는 고유한 그 무엇은 원래 존재하지 않으며 어차피 나라는 관념은 타인이 규정지어 주는 것이고 인식 자체는 타인에 대한 인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텅 빈 그 육체를 그대로 비워 두는 것, 규정할 수 없는 그대로 ‘나’라는 육체를 비워두는 것, 그것은 인위가 없는 무위의 상태가 되는 것이며 물아일체의 상태를 의미한다. “그렇다고 인생은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은 이름을 모른다. 이 나무는 새로 난 나뭇잎이 흔들릴 때 호흡한다. 나는 나무다. 나무이자 구름이다. 내일은 책이나 바람이 된다. 다시 말해 내가 읽는 책, 내가 마시는 바람이 된다. 모든 것이 외부에서 방랑한다.” 모든 것은 매 순간 새롭게 존재하며 매 순간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쓸모없는 외형의 공허함을 만들 필요가 없다. 이제 그는 이렇게 끝을 맺는다. 난 매 순간마다 죽고, 그리고 아무 기억도 없이 새로 태어난다. 내 안에서가 아니라 외부의 모든 사물 속에서 완벽하고도 생생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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