므로제크: 혁명-기분전환
내 방에 침대는 여기, 옷장은 저기, 책상은 그 사이에 있었다. 별로 심심한 줄 모르고 살 때까지만 해도 그랬었다. 나는 침대를 저기로 밀고, 옷장을 이쪽으로 끄집어냈다. 한동안은 뭔가 새롭게 바뀐 것 같아 생동감이 넘쳤다. 그러나 시간이 조금 지나자 다시 지루함이 밀려왔다. 나는 그 이유가 책상, 좀 더 정확히 말해 옮기지 않고 방 한가운데 그대로 놓아둔 책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책상을 저리로 밀고, 침대를 가운데로 끌어냈다. 전혀 어울리지 않게. 다시 분위기가 새롭게 바뀌어 생동감을 느끼는 동안은 어울리지 않음에 따른 불편함에 어느 정도 만족하며 살았다. 그러나 그것도 나름대로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이제는 침대에 누우면 그동안 늘 해오던 대로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릴 수 없게 된 것이다. 시간이 지나자 새로운 것도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닌 채 불편함만 고스란히 남았다. 그래서 나는 침대를 이쪽으로 끌어내고, 옷장을 방 한가운데로 옮겼다. 마침내 파격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방 한가운데 놓인 옷장, 그것은 서로 어울리지 않게 배치한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차리리 전위예술에 가까웠다. 그러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아, 세상에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라는 말이 아예 처음부터 없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방 한가운데 옷장을 세워두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울 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일이 되어버렸다. 뭔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킬 만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정해진 한계 안에서 진정한 변화를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한계 밖으로 나서야만 하는 것이다. 그저 어울리지 않게 배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전위예술조차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면, 혁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나는 옷장 안에서 잠을 자기로 결정했다. 혹시 옷장 안에 서서 잠을 청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발바닥이 간지럽고 등이 아픈 것은 참는다 하더라도, 자리가 불편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정말 그것은 올바른 결정이었다. 그야말로 완벽한 성공을 쟁취한 것이다. 이번에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의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난 후에도 나는 변화에 익숙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변화는 변화로 남고 시간이 지날수록 아픔이 더 심해졌기 때문에 오히려 변화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내 정신적 인내에 한계가 없었다면 그것은 내 일생일대의 최고의 결정으로 남을 수 있는 일이었다. 어느 날 밤, 나는 그 상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옷장에서 나와 침대에 드러누워 버렸다. 그리고 시곗바늘이 세 바퀴를 도는 동안 깨지 않고 잠을 잤다. 그런 다음 방 한가운데 옷장이 버티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옷장을 벽 쪽으로 붙이고, 책상은 방 한가운데로 밀어놓았다. 이제 침대는 다시 여기, 옷장은 다시 저기 있고, 책상은 그 사이에 있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살다가 지루함이 몰려올 때면 한때 혁명가였던 시절을 머릿속에 떠올려보곤 한다.
이 글은 폴란드 작가 "스와보미르 므로제크"의 단편집 <초보자의 삶>의 첫 번째 단편인 "혁명 - 기분전환"이란 작품의 전문이다. 저 짧은 글을 통해서도 무릎을 탁 치게 만드는 므로제크 특유의 기발함이 돋보이는 작품이기도 하다. 므로제크의 단편들은 아주 일상적이면서도 그 일상이란 루틴을 단번에 비껴가 버리게 만드는 기발함이 존재한다. 그런 기발함 속에서 어떤 참신함을 발견할 수 있기에 므로제크의 이런 발상 자체가 혁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소소한 일상에 대한 기분전환이라는 가벼움이 거대한 혁명으로 다가오다니... 거창한 혁명이 아닌 지극히 개인적인 혁명!
우리가 혁명이란 단어를 떠올릴 때 느끼는 것은 항상 거대한 무엇이다. 프랑스 대혁명이나 러시아 소비에트 혁명, 중국의 문화 혁명이나 프랑스 68 등등 세계사를 굵직하게 수놓았던 혁명들과 사건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동반되는 무장 투쟁, 봉기, 내전, 혼란, 유혈... 혁명이란 이미지는 이렇게 강진이나 쓰나미에 비유될 만한 국가 차원의 거대한 변화와 전복 또는 위기나 비극을 동반하는, 언제나 거대한 담론의 측면에서 언급된다. 이는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제주 4.3 항쟁,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 1987 6월 항쟁... 우리 현대사에서 혁명이나 항쟁이라고 불릴 만한 굵직한 사건들 역시 기존에 우리가 떠올리게 되는 이미지와 별반 차이는 없는 듯 하다. 특히나 대한민국에서의 혁명은 세계사적 좌우 대립의 투쟁들을 짧은 시기에 축약시켜 놓은 듯 현대사에 녹아 있기에 더더욱 그럴 것이다. 응축된 이 현대사의 과정은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이었을 것이고 그렇기에 한 때는 혁명을 꿈꾸었을 수많은 투사들을 양산해 냈다. 하지만 당시의 투사들이 꿈꾸었던 혁명은 너무나도 거창한 혁명이었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억지로 부여잡아야만 하는 서글픈 그 무엇이었으리라. 그들의 혁명은 쉽게 말해서 하나의 거대 담론이었으며 현실의 공간에서는 끊임없이 패퇴하고 깨지고 무너져 내림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공간에서는 공허한 개념의 향연으로 펼쳐졌던 너무나 추상적인 담론이자 구호였다. 무너지면서도 어떻게든 부여잡고자 버티게 했던 힘은 어찌 보면 순수한 초심이었고 열정이었으며 교조적 과잉이었으리라...
하지만 세월은 천천히 그 열정과 과잉을 녹여 주었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그래서 사람을 점차 오른쪽으로 향하도록 하는 것이라고들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연유로 세월이 흘러 그때를 생각한다면 '치기'라는 단어를 자연스레 떠올리겠지만, 그 치기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나'라는 존재를 규정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세월이 방향 지운 것은 우편향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담론의 전환이 아닐까? 세월이 깎아준 것은 열정의 과잉이며 그것은 바로 거시적인 것에서 미시적인 것으로의 점진적 전환이 아닐까? 그 전환은 교조적 추상성에서 일상적 구체성으로의 전환을, 거대 담론에서 소소한 이야기로의 시선 전환을 의미할 것이며 이제 투사들은 세월과 함께 일상인이 되어간다는 의미 역시 담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우리'라는 공동체적 과제보다는 '나'와 '너'라는 개체성의 소중함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이전의 거대한 혁명 담론 대신 너와 나라는 개인들의 소소한 이야기들이 하나씩 개별적으로 모이고 모여 '촛불'이라는 전혀 다른 형태의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세월이 깎아 준 열정의 끝자락을 걸친 시점에서 이 소설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느낀다. 피식~ 실소를 터뜨리기도 하며 무뎌진 열정에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도종환 시인은 '말사 근처'란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버린다 버린다는 생각 하나 더 품고 살아가는 거지 오늘처럼 절 주위나 맴돌다 가는 거지". 그게 우리의 일상이 아니던가? 무언가를 버리기 위해, 비우기 위해 산사를 찾고 여행을 떠나지만 돌아올 때에는 더 많은 것을 지고 오는 것이 차안(此岸)의 삶일 것이리라. 그래도 어떠한가? 그것이 삶이고 그것이 인생인 것을... 버리지 못한들, 그냥 기분전환으로 용감하게 훌쩍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에겐, 물론 지극해 개인적일지라도, 커다란 혁명이 아니겠는가?
2015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