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를 배우다보면 (독일사람들한테는 좀 미안하지만) ‘왜 이렇게 쓸데없이…’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명사 성별을 2개도 아닌 3개씩이나 만들어놓은것도 그렇고, 명사의 역할이 직접목적어akkusativ이냐 간접목적어dativ이냐, 또는 소유격genetiv이냐에 따라서 주구장창 모양이 바뀌는 관사도 그렇고, 이 복잡한 문법들을 배우다보면 머리에 쥐날것 같을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독일어에는 또 하나 골때리는 영역이 있으니, 바로 ‘숫자읽기’ 되시겠다. 어이없게 들리겠지만 독일어에선 숫자를 거꾸로 읽는다. 다행히도 모든 숫자가 그런건 아니고, 10의자리 숫자, 정확히는 21부터 99까지만 그렇다. 예를들어 25는 ‘5와20 (fünfundzwanzig)’, 63은 ‘3과60(dreiundsechzig)이라고 읽는다. (!!) 여기서 끝이 아니다. 숫자가 커지면 영어에서 그렇듯 독일어에서도 만萬단위 없이 1,000단위로 끊어 읽는데 (53,000을 53 thousand 이라고 읽듯), 이때 십의자리가된 숫자는 모두 거꾸로 읽어야 한다는 사실. 예를들어 숫자 53,126에서는 ’53’과 ’26’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 (!!!!!) 저 숫자를 독일어식으로 말하면 ‘3 and 50 thousand 1 hundred 6 and 20 (dreiundfünfzig tausend ein hundert sechsundzwanzig)’가 된다. 느낌이 오시는가. 우리의 기본적인 사고의 흐름을 역행하는 이 이상한 읽기체계 때문에 독일에서 숫자를 읽고 말할때마다 머릿속으로 얼마나 왔다리갔다리를 반복해야 하는지!
여기선 물건을 사든 밥을 먹든 10의자리로 돈쓸일이 많은데다가, 유로는 소수점 두자리까지 가격이 매겨져있을때가 대부분이라 (29.49유로 처럼), 계산할때마다 머릿속에선 숫자가 자기 자리를 찾느라 바쁘다. ‘29.49유로에요’라는 점원의 말을 듣는 순간 몇초간 정지, 들은 숫자를 머릿속으로 되짚은 후 되묻는다, ‘9와 40 맞죠?(neunundvierzig)?’
계산할때 뿐이냐, 날짜와 시간을 말할때(병원엘 가든 시청에서 서류를 떼든 다 예약제로 운영되는 독일에선 특히나 많이 듣고 말하게되는 것), 전화번호나 카드, 회원번호를 받아적을 때 같이 숫자가 등장할 때마다 렉걸린 컴퓨터마냥 멈칫멈칫, 들은 숫자를 맞게 처리하느라 나도 모르게 긴장하곤 한다. 4년을 살았어도 여전히 적응이 필요한 독일의 숫자읽기다.
머릿속으로는 9와80을 생각하면서 쓸땐 89를 써야하는 이 이상한 표현체계를 독일인들도 헷갈려하긴 마찬가지다. 특히 정상?적으로 왼쪽부터 읽는 외국어가 끼어들면 상황은 더 복잡해진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인들은 영어로 대화할 때 종종 숫자를 뒤집어 말하곤 한다. (그리고 외국인으로서 이 실수에 더 민감한 내가 교정해주곤 한다) 컴퓨터로 숫자를 칠 때도 생각하는거 따로, 누르는거 따로이니 회계실수가 빈번하단다. 이미 쓸만큼 써 익숙해진 어른들도 그런데 이제 막 배우는 아이들은 오죽할까. 가엾은 독일 아이들은 이 거꾸로 읽기법 때문에 산수 학습에 꽤나 애를 먹는다고.
이렇게 ‘쓸데없는’ 읽기법이 어쩌다 생긴건지 궁금하지 않을수가 없다. 그래서 찾아보니, 어머나, 그보다 먼저 재미난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독일어만 그런게 아니란다!
놀랍게도 영어도 16세기 전까진 독일어처럼 숫자를 거꾸로 읽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twenty-four이 아닌 four-and-twenty라고 읽었던거다. 노르웨이는 더 최근에서야(1951년) 10의자리를 1의자리 앞에 읽기로 법을 고쳤다. 그러고보니 잘 들여다보면 11-19사이의 숫자는 영어에서 아직까지도 거꾸로 읽고 있다. (thir-teen, four-teen, fif-teen을 보시라, ‘3-10’, ‘4-10’, ‘5-10’이 생각나지 않는가?) 아예 ‘명사화’되어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말이다!
고집한다기 보다는 단순히 고칠 기회를 못찾고 있는게 아닐까 싶다. 독일이 (그리고 독일어를 쓰는 이웃국가들이) 지금 읽기체계를 개정하면 원래 방식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오히려, 적어도 몇세대 동안은, 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다. 개정의 필요성은 계속 논의되지만 실천이 어려울수 밖에 없는 이유다. 독일 입장에선 일찍이 이 골칫거리를 해치워버린(?) 영국과 노르웨이가 쬐금 부러울수도 있겠다.
16세기 영국이 거꾸로 읽기법 개정을 이뤄낼 때, 독일은 처참했던 30년 전쟁을 겪고 350여개의 나라로 조각조각 나버렸다. 이러한 상황은 1871년 비스마르크에 의해 통일되기까지 계속돼, 독일이 영국처럼 일찍이 전면적인 개정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꼽히곤 한다.
아무래도 산수계산을 할 때의 로직의 흐름 (1의자리->10의자리)이 읽는방법에까지 반영된게 아닌가 한다. 존경받는 독일의 수학자 아담 리스Adam Ries가 16세기 독일에 널리 전파한 주판산수법이 이러한 읽기체계를 형성한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그의 산수법을 보면 로마주판을 본뜬 주판 위에 동전을 두고 1의 자리부터 5를 지나 10의 자리, 50을 지나 100의 자리 순으로 계산해 올라가는 식이다. 이 1의 자리에서 10의 자리로 가는 계산순서 때문에 숫자를 읽는 순서까지도 1의 자리->10의 자리가 되었을 수 있다는 추론이다. (사실 요즘 우리가 배우는 산수도 1의자리에서 10자리 순서로 계산하는건 마찬가지)
요리조리 뜯어보고 나니 전혀 말이 안되는것 같지는 않은 독일어의 숫자 거꾸로 읽기지만, 우리 뇌는 계산을 할 때와 숫자를 읽을때 각기 다른 모드로 돌아가고, 우리의 기본적인 사고흐름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인다는 점을 감안하면, 여전히 적응하기 참~ 어려울 수밖에 없는, 독일어의 숫자 거꾸로 읽기 되시겠다.
<참고문헌>
Nie wieder Zahlendreher?, Zeit.d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