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차파리타Lee Sep 10. 2020

김치가 여행가방에서 터진 날

독일 지하철, 터진 김치 운반 미션

때는 바야흐로 코로나 기원전 1년, 여행이 자유롭던 시절.

동생이 한국에서 방문했다. 한 달 정도 우리 집에 머물면서 한량처럼 쉬고 가겠다는 게 동생의 목표. 독일까지 날아와서 그러겠다는 발상에 역시, 내 동생답군, 싶은 생각을 하며 공항버스에서 내렸다. 저 멀리 동생인 것 같은 가냘픈 실루엣이 눈에 들어왔다. 이름을 부르며 한걸음에 다가가자 피곤에 절은 동생의 얼굴이 들어왔다. 

"좀 잤어?" "아니, 옆좌석에 앉은 중국 아줌마들이 오는 내내 떠들어대서 한 숨도 못 잤다." 

"좀 조용히 해달라고 하지, 그걸 왜 클레임 안 하고 미련하게 버텨!" 

"몰라. 말해도 안 그만뒀을걸. 그나저나 언니, 어떡하지, 김치 터진 거 같아."


그렇다. 해외에 사는 딸내미 혹여나 잘 못 먹고 다닐까 봐 걱정이 많으신 울 엄마. 동생이 날 보러 독일에 온다니까 신이 나서는 김치에, 밑반찬에, 떡에 온갖 먹을걸 바리바리 싸 보내셨다. 먹을 것만 여행가방 큰 거 하나 가득이다. 그런데 경유까지 해서 15시간 가까이 날아오는 동안 가방에 든 김치가 익으면서 터져버린 것. 배추놈이 터진 건지 총각무 이놈이 터진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가방에서 스며 나오는 강력한 냄새의 파장으로 보아, 터진 것이 분명했다. 그 와중에 다행인 건, 여행가방이 딱 김칫국물 색이라는 거. 국물 좀 스며 나와도 모를 판이다. 


그나저나, 냄새 때문에 이걸 어디 가서 열어볼 수도 없고. 연다고 한들 어쨌든 집에까지는 들고 가야 하는데, 다른데 옮겨 담아도 이 강력한 냄새는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들고 가는 수밖에!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다. 독일 지하철(s-bahn)을 타고 신김치 냄새가 작렬하는 캐리어를 옮겨야 하니까. 

우선 동생을 다독였다. 이럴 때 먼저 용기와 결단력을 보여주는게 언니의 역할일 터. 

"어쩔 수 없다 동생아. 내가 김치 캐리어를 끌 테니 네가 다른 캐리어 들고 와. 괜찮아, 할 수 있어."


프랑크푸르트 지하철에 올랐다. 사면이 막히니 오픈된 곳에 있을 때 보다 김치 냄새의 위력이 배는 되는거 같았다. 다행히도 지하철은 한가한 편이었다. 우리는 좀 더 한산한 칸의 출입구 쪽에 캐리어를 끌고 가 섰다. 그나마 문이 열렸다 닫혔다 하면서 환기도 될 거고, 사람들도 자리에 앉으러가지 머무는 곳이 아니니까 이게 우리에겐 최선인 듯했다.

신김치 냄새가 고요히 공기를 감쌌다. 중간중간 웨이브를 타듯, 김치 냄새가 콧 속으로 훅! 강펀치를 날려왔다.

빈틈없는 김치 냄새에 둘러싸여 김치와 한 몸이 된 것 같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동생 얼굴도 딱 김치색이다.  

아 신(김치)이여! 창피함과 미안함이 방언 터지듯 수다로 터져 나왔다. 평소에 참 말 없고 단답형인 내 동생, 공공장소에서 말 이렇게 많이 하는 건 처음 본 듯.

"와 김치 냄새.. 와.. 어쩔거야 이거.. 와.. 너무 미안하네, 독일사람들한테"

아무 일 없는 척하느라 입은 쉬지 않고 떠들어대면서 눈은 사람들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방금 내린 사람 우리 쪽으로 오면서 손으로 코 막았어.."

코를 만지든, 긁든, 휴지로 코를 풀든, 사람들이 코에 행하는 모든 행위가 우리 때문인 것 같았다. 우리 곁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또 어찌나 빠른지. 

'그래, 우리도 이 냄새가 이렇게 힘든데, 당신들은 어떻겠어. 내가 정말 미안합니다. 제발 저 멀리 우리한테서 떨어지세요. 조금만 참아줘요. 우리 곧 내려요.'

그래도 그날 지하철에는 유독 점잖은 사람들만 타있었나보다. 코를 막고 지나가고 발걸음은 빨라졌을지언정 그 고약한 냄새의 발원지까지 쫓아와 뭐라고 한 사람은 없었으니.


공항에서 집 앞 역까지의 40분이 몇 시간처럼 느껴졌다. 김치와 이렇게 가까이, 깊게 소통해본 적이 있었나 싶은 생각이 들던 찰나, 문득 깨달았다. 이게 김치가 아니라 엄마의 사랑이라는 것을. 한국에서 출발한 엄마의 사랑이 오는 길에 부풀고 부풀어 터졌다. 지금 내 주위에 진동하는 이 냄새는 김치 냄새가 아닌 엄마의 사랑인 것! 김치는 그저 형체일 뿐, 그 진실은 딸내미가 해외에서도 잘 챙겨 먹고, 건강히 잘 지내기를 바라는 어무이의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 냄새나는 김치를 어디다 갖다 버릴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그 에너지를 있는 그대로 다 느끼며 집까지 모셔가는 수밖에. 

울아부지와 어무이


그렇게 한 편의 시트콤 같았던 지하철 여행이 끝나고, 우리는 무사히 터진 김치를 모시고 집에 도착했다. 

그날만큼은 동생과 나 사이에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돈독한 전우애 같은게 흘렀던거 같다. 어려움을 함께 헤쳐나간, 운명 공동체에서 느끼는 그런 것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랑 동생이 이렇게 긴밀히 서로에게 의지했던 순간이 또 있었던가. 시어 터진 김치 덕에 별 경험을 다 해보는구나. 

2019년, 김치가 여행가방에서 터진 날이다.


작가의 첫 번째 김치 에피소드 <독일에서 김치 수업을 열다> 보러 가기.





 

작가의 이전글 나는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