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빠진 사발

by 김도형


저녁 식사 후에는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산책이라야 동네를 한 바퀴 돌거나 가까운 공원을 다녀오는 정도이지만 집안에만 있을 때보다 상당히 소화에 도움이 된다. 산책도 코스가 매일 똑같으면 지루해지기 마련이라 골목길을 달리해서 걷는다. 걷다 보면 건물의 유리문에 비친 느릿느릿한 나의 걸음걸이를 보게 된다.

요즘 tv 프로그램에서는 국민 소득 향상에 걸맞게 장수와 건강에 관한 코너가 인기이다. 전문가들과 연예인들이 패널로 등장하여 정보를 해학으로 버무려서 전달 효과를 극대화한다. 대체로 그들이 중장년층에게 권하는 운동은 무리가 가지 않는 걷기이다. 그런데 걷기 운동이 효과를 보려면 약간 땀이 날 정도로 빠르게 속도를 유지하며 삼십 분 이상을 계속해야 한다.

공원으로 나가보면 담장을 따라 빠르게 걷거나 뛰는 젊은이들이 꽤 있다. 그들과 함께 뛰어보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그러할 에너지가 몸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그래서 혼자만의 리듬으로 골목길을 여유롭게 걷는 것을 즐긴다. 골목길 산책의 유일한 단점은 전방등을 강하게 비추며 마주오는 차량들이다. 요즘 들어 시력 저하로 곤란함을 겪기에 야간의 차량 불빛에도 여간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청소차가 다녀가기 전의 골목길을 걷노라면 건물 모퉁이나 집 앞에 놓인 쓰레기나 재활용품을 보게 된다. 당연히 어느 집주인이 배출 기준에 따라 깔끔하게 정리해서 내놓는지 한눈에 보인다. 또 나와 있는 물건을 보면 누군가 오늘 새 침대에서 단잠을 자겠구나, 어디론가 이사를 갔구나, 이제 아이가 다 컸구나를 짐작하게 된다.

어느 날 산보를 하다 보니 가로등 아래에 반짝이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릇이 몇 개 놓여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 이렇게 예쁜 그릇이 왜 나와 있지?
그릇은 다완보다는 조금 더 컸는데 아마 일본식 밥그릇일 듯했다. 손으로 들어 자세히 살펴보니 둥근 테두리에 두세 군데 이가 빠져 있었다.

오래전에 영국을 배낭여행한 적이 있다. 유서 깊은 중부 도시 요크에서 주말에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벼룩시장에 들렀다. 정말로 아기자기한 액세서리와 생활용품을 애지중지 가지고 나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오래된 물건들이니 적당히 저렴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이는 내 짐작에 불과했다. 영국인들은 스타일이 구식이라도 연혁이 오래되고 스토리가 얽힌 물건엔 듬뿍 애정을 쏟는다. 그만큼 소장한 물건에 대한 자부심도 크고 부르는 가격도 만만치가 않다. 물건이 가진 약간의 흠은 실제로 사용되었던 역사를 증명하는 것으로 그만큼의 값어치가 있다.

여러 왕조에 걸쳐 도자기 문화를 꽃피웠던 우리나라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선진 문화의 산물인 도자기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기에 도자기들이 매우 귀하게 취급되었다.
도자기는 깨지기 쉬워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지만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어른들은 이 빠진 그릇은 재수 없다고 하여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릇 조달이 충분히 가능했기 때문에 생긴 문화이다. 그런데 일본의 어느 고급 요리점에서는 조금씩 이가 빠진 오래된 그릇들을 계속 사용하며 손님들도 기꺼이 그릇이 가진 연륜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그것은 과거에 도자기를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일본의 역사가 만든 현상이다.

일본인들이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 지칭하는 이유가 있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 패하여 물러가던 일본군은 다수의 포로를 끌고 갔는데 그중에는 매우 귀중한 장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조선의 도공과 봉제공과 잡화공 등이었다. 그중에서도 도자기 기술은 손쉽게 익힐 수 없는 고난도의 테크닉이었다. 그래서 아예 평생을 바쳐 그 기술을 습득한 도공들을 납치한 것이다. 끌려간 도공들은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 꼽으면서도 일본 막부와 영주들의 비호 아래 자기 가마를 열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기호에 맞는 화려한 도자기 시대를 열면서 서양으로의 수출도 시작했다. 이로써 일본은 서양과의 여러 기술 교류를 활발하게 전개했으며 부를 축적하였다.

임진란 때 남원에서 끌려갔던 대표적인 도공 중 한 사람이 '사쓰마 도기'를 개창한 심당길인데 조국과 조상을 잊지 않고자 12대 심수관 이후 후손들은 계속 같은 이름을 사용하여 현재 15대 심수관에 이르고 있다. 또한 일본이 자랑하는 '아리따 자기'의 원조인 이삼평 역시 이때 끌려간 조선 도공이었다. 청아한 백자를 위주로 한 도자기를 굽던 그들은 일본의 무신 정권이 선호하는 화려한 색상의 도자기를 만들어냈다. 그래서 일본의 도자기 컬렉션을 살펴보면 다양한 색상과 질감의 도자 속에서도 고고한 백자의 기품을 전승하는 작품들이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다.

14~15 세기의 조선의 도자기 기술은 양질의 흙과 불과 가마의 복합 예술이었기에 당시 일본으로서는 도저히 흉내내기 어려웠다. 지금의 반도체 기술만큼의 고난도의 첨단 기술이었던 것이다. 일본은 이 기술 탈취를 통해 문화, 경제적으로 한 단계 상승했다.

조선 진주 지방에서 제를 올릴 때 사용하던 막사발이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있다는 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애지중지하던 막사발은 일본 내 명품 3대 막사발로 꼽힌다. 당시 막사발은 사진으로만 보아도 꾸밈없는 소박한 인간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배경 사진)

사실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막사발은 청자나 백자와는 달리 장인의 섬세한 손길을 가하지 않은 서민적인 그릇이다. 또한 막사발은 본디 차를 따라 마시는 다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데요시는 오사카성에 황금 다실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조선의 막사발로 가득 차를 따라 마시며 그 그릇을 황금보다 귀하게 여겼다. 여러 가지 용도로 일상생활에서 편리하게 사용되던 조선의 사발이 일본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대접을 받았던 것이다.

직접 가서 본 황금 다실은 규모가 작은 편이었지만 그곳에서 당시 일본의 최고 권력층의 의사 결정이 이루어졌다. 또한 차를 마시며 수하들의 충성도를 시험했으며 가장 신임하는 부하 장수에게 조선에서 건너온 막사발을 하사했다. 하사 받은 막사발의 위력은 일본 내에서 경쟁 관계에 있는 상대 장수의 침략까지도 저지할 정도였다.



가로등 불에 그릇을 뒤집어 비춰보니 made in japan이라고 적혀 있었다. 타국으로 흘러가서 그 나라의 제일 국보가 되어버린 진주의 막사발이 떠올랐다. 시대도 형태도 달라졌지만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장인들의 의지는 변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야만스런 이국의 풍토 속에서도 예술혼을 불태운 장인들. 그들은 그릇 하나하나에 고국의 부모형제를 그리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을 것이다. 그 혼이 흠이 난 채 하나의 평범한 사발이 되어 지금 나타난 것은 아닐까?...

온전한 인간의 역사는 없는 법이다.
이가 빠진 자기의 일생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어느 어린 도공이 아버지의 가마에서 구워낸 첫 자기일 수도 있다. 그리고 해협을 건너 서울의 어느 가정집에서 쓰임을 받다가 더 강도가 센 본차이나에 부딪혀 상처를 입었을 수도 있다. 어느 날 주인은 거처를 옮기면서 별다른 생각 없이 평소에 눈에 거슬리던 몇 개의 그릇과 가구를 문밖에 내놓았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마주한 그릇엔 먼 옛날 조선 도공의 숨결이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돌아오는 길을 그 그릇과 동행하면서 사발에 얽힌 사연들을 천천히 상상해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