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결정적인 순간에 칼끝을 들이밀었다
수없이 누웠다 일어섰다를 반복하며
암초 가득한 미로를 간신히 헤쳐갔다 생각했는데
운명의 여신은 길 모퉁이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그녀가 내민 책자에는
나의 행적에 대한 모든 기록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무엇을 겪고 알게 되었는지
그로 인해 어떤 세계를 보았는지를
기술하라고 쓰여 있었다
어느덧 생존만을 기억하며 살아온 날들은
얇은 빈 조개껍질처럼 힘없이 부서졌다
내가 길을 처음 떠날 때 간직했던 맹세는
낡은 배낭 바닥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었다
때가 되면 약속했던 모든 것들이 찾아오는 법
그 순간의 전율이 온 몸을 아프게 관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