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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Dec 10. 2021

다시 꺼내 본 <한라산 유정>


* 점심 먹고 약국 가는 길에 조금씩 빗방울이 떨어졌다.

기온이 낮았더라면 회색 하늘은 영락없이 눈을 품어 떨구었을 것이다. 행인들도 우산을 들지 않은 쪽이 더 많았다. 어깨 위로 내려앉는 고운 빗방울.

지난해에 들렸던 제주 풍경이 궁금해졌다.


다시 꺼내 보니 주절주절 내레이션이 길다. 아마 지금보다는 열정이 좀 더 살아있던 듯하다.

그러고 보면 브런치에서의 첫 해는 누구에게나 설렘과 긴장으로 가득할 것이다. 그 이후는 서서히 바람이 빠지는 그러나 응축된 시간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는 함께 한다는 연대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 고독하게 글쓰기 십상인 작가들의 특성상 댓글을 통한 소통은 아주 큰 버팀목이 될 수 있다. 어울림의 긍정적 효과를 최대한 활용할 때 미완의 글도 발행할 용기를 얻게 된다.

브런치의 장점은 시간을 두고 언제든지 가필과 수정이 가능하다는 것 아닌가.


아래 글은 예전 모양에서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러므로 전에 일독하신 분은 기꺼이 스킵하실 일이다.

올 겨울 기회가 되면 눈 내린 제주와 한라산의 설경을 다시 그려볼 수도 있겠다.


글을 읽는 동안 차창밖으로한강의 잔물결이 교각 그림자를 잡아 흔들고 있었다.




큰 섬에 비가 내린다.


제주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이 보인다.  할망이 상주하는 그 산은 늘 구름과 비를 불러 모은다. 수시로 가까운 바다, 먼바다에서 피어난 수증기들은 산기슭에 흰구름으로 춤추며 모여든다. 구름은 또 다른 구름을 불러들이고 서로 뭉쳐 덩어리 지며 마침내는 초콜릿색 얼굴로 울먹이고 만다. 그리곤 기어이 독을 깨뜨리듯 미어진 가슴을 산아래로 한가득 쏟아낸다.


한라산은 간혹 조각구름을 옹기종기 정상 부근에 불러 모아 여러 동네의 얘기를 듣거나 그것도 지루하면 뿌연 안개 장막을 온몸에 두르고 한가히 누워 쉰다. 어느 아침엔 작은 구름 고리를 도넛처럼 만들어 화관으로 쓰고 시집가듯 곱게 단장한다. 또 다른 날엔 머리에 이고 있던 구름 안개를 뜨거운 치즈처럼 골짜기마다 길게 흘려보낸다. 마치 더운 음식을 여러 자식에게 나누어주는 어미처럼.


 그리고 어느 저녁엔 색색이 화려한 구름 옷감으로 치장하여 바라보는 이를 속절없이 울렁이게 만든다. 그때엔 그곳에 깃들어 사는 모든 짐승들의 눈동자에도 노을이 무늬 진다. 그리고 공중에 높이 날던 새들도 배가 부르든, 부르지 않든 서녘의 조각 빛이 사라질 즈음이면 서둘러 산속 깊은 골짜기로 돌아간다.


어쩌다 건조한 날씨가 거듭되어 바닷바람조차 눅눅함을 걷어내고 바스락 소리가 날 것 같은 때가 있다. 그리면 산 정령도 말을 하려는 듯 투명한 대기 속에서 크게 한걸음 앞으로 다가온다. 그런 날엔 산머리의 모양과 계곡선들이 연필선처럼 뚜렷하다. 산 정상에서부터 바닷가 끝까지 길게 흘러내리는 능선. 산의 양쪽 능선은 흙내음 나는 할망의 넓은 치마 품처럼 완만히 펼쳐진다.


 그러나 그런 날씨는 잠깐이요, 대개는 안개와 비가  떠돌면서 산 곳곳을 적셔낸다. 그렇게 내린 빗물은 의 속살 깊이로 스며든다. 물방울은 모든 화산암마다 머물러 이끼를 피워내고 초목을 키워내고 산을 의지한 생명들의 마른 목을 축여준다.


먼 바닷가로부터 사람들의 동네를 떠나 조금만 길을 걸어도 곧바로 검은 돌무더기와 푸른 잡목 군을 마주하게 된다. 또 이리저리 걷다 보면 군데군데 자리한 크고 작은 오름들이 나타나고 오름 자락 아래로는 손을 넣어보고 싶도록 맑은 물이 흘러간다. 작은 계곡물을 건너면 낯선 새 울음이 숲에 퍼지고 소슬바람에 나뭇잎들이 일제히 뒤집히며 은빛 얼굴로 찰랑거린다.


그 광경을 바라보면, 놓지 못하고 숲 속까지 끌고 들어온 일상의 번거로움이 선명히 드러난다. 그리고 마치 금단의 땅에 무단침입이라도 한 듯 부끄러움이 가만히 생겨나서 걸음은 한없이 조심스러워진다.


그 길 위 어디에나 흩어져있는 검은 돌들은 햇빛조차 빨아들이며 태고의 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그들이 반짝 생기를 띠는 순간은 산 할미가 섬 곳곳에 촉촉이 비를 뿌려줄 때다. 그러면 돌들은 생글거리는 얼굴로 참았던 모든 얘기를 큰 숲이 소란하도록 뱉어낸다. 큰 돌 사이에 숨은 작은 돌들도 수많은 숨구멍으로 오랜 시간 지내온 사연을 소곤거린다. 그때는 지나던 나그네도 만년의 세월을 겪은 화산암 앞에 번뇌를 내려놓기 좋은 시간이다.


행인은 그 돌들을 딛고 한 마리 짐승처럼 좁은 길을 따라간다. 길의 좌우로는 낯선 식물과 날벌레가 보이고 얕은 골짜기를 따라 투명한 계곡물이 햇살을 튕겨내며 흘러간다. 그렇게 물길을 따라서 숲의 경계에 들어서면, 사람의 흔적은 끊기고 갑자기 운무가 훅 품에 안기며 몸속으로 스며든다.


 산의 정령이 젖은 손으로 이야기하다!


사람의 음성 아닌 숲의 소리로, 계곡의 소리로, 낮은 하늘의 울림으로 말을 한다. 그 속에서도 간혹 산새들이 비의 장막을 뚫고 의연 날아간다. 나뭇잎들은 굵은 빗방울에 후드덕 소리 내며 흔들리고 순식간에 덩치를 키운 골짜기 물은 몸을 비틀 힘껏 바위에 부딪힌다.


숲은 비와 안개로 뒤덮여 있다. 육지 수목과 남방 아열대의 초목이 뒤섞인 숲은 신비롭다. 그리고 비 내리는 숲 속은 어둡고 미끄러워서 무섭기까지 하다. 숲은 여간해선 길은 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앞으로만 걸을 수밖에 없다. 대체 이 길을 처음 간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찾아 이곳을 걷고 있는 것인가?


 옛사람이 맨발로 걸었을 그 길 나그네는 문명의 덧신을 신고 지나간다. 땅 위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딛고 검은 화산토를 밟아 마침내 길 끝에 도달하면, 마법처럼 높은 숲은 사라지고 키 작은 관목만이 듬성듬성 자라는 대초원이 한순간에 활짝 펼쳐진다. 산 할미가 호미로 산 전체를 빙 둘러 거대한 금줄을 그어놓은 듯 숲과 초원의 경계는 뚜렷하다. 간간이 무릎 높이 나무만이 손을 뻗어 다리를 건드릴뿐 거칠 것이 없어 가슴은 뻥 뚫린 듯 시원해진다.


 고원 지대의 비바람은 온몸을 휘어 감으며 켜켜이 장막이 되어 공중으로 날아간다. 발아래엔 검은 화산 흙 알갱이가 서걱거리고 고인 물웅덩이가 좁은 길을 가로막는다. 아무래도 산 할미가 오라 하는 지점이 여기까지인 것 같다. 고개를 들어 안개비로 가려진 산 정상을 한동안 묵묵히 바라본다.


빗속의 한라산과 천년 주목의 땅에 선 나그네.

그 둘의 풍경이 거대한 부조처럼 공중에 새겨졌다.




 비 탓인지 호텔 밖 항구엔 비린내가 번져 있었다. 그렇게 어제부터 내린 비는 공항까지 따라오고 비행기 유리창에도 점점이 달라붙었다. 이륙한 비행기가 좌우로 크게 한 번씩 동체를 기울이자 창 밖으로 운무 가득한 한라산이 살아있는 듯 오르내렸다.


 강렬한 냄새로 남은 빗속의 제주.


 그곳은 바다 건너 먼 땅에서도 상처처럼 문득문득 통증을 유발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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