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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Dec 30. 2021

항만에 내리는 눈


부산 항만에 진눈깨비가 내린


수많은 조각 눈들은

바다 위의 북항대교를 돌아 

이리저리 파헤쳐진 나대지를 지나고

땅 위에 길게 누운 철로와 도로를 건너

높은 빌딩 사이로 재빨리 빠져나간


전조등을 밝힌 차량 앞에서

활짝 손짓하며 하얗게 흩날리다가

기차역 건너편 텍사스 거리와

차이나타운으로 쏟아져 들어가서

붉은색 조명 클럽 앞에 선

짧은 치마 입은 이국 아가씨들의

눈동자에도 점점이 내려온


그리곤 언덕 이바구길을 따라

초량교회와 성당과 소림사를 지나

수백 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길을 날마다 오르내렸던

흰 얼굴의 키 작은 모든 이들을 추억한


늙어 구부러진 나무 아래

한 칸 성황당을 지나

산복도로 골목골목을 훑어 밟아

나훈아의 색 바랜 레코드판 노래를 듣고

김민부의 기다리는 마음으로 간절해졌다가

산 중턱 모퉁이 길

어느 노파의 빈 의자 위에 털썩 내려앉는


잠시 후 나부끼던 눈은 다시 일어나

산꼭대기 허름한 집의 살림살이를

아린 눈빛으로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마침내 등성이를 넘어 골짜기 아래로 달려 내려간


12월 끝의 어두운 밤은 아쉬운 듯 눈을 지어내

산동네 사람들은 켜켜이 맞닿은 지붕 아래서

저마다 하얀 꿈을 빚어낸




* 남녘 부산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눈이 내린다. 그것도 중부 지방에 비하면 찔끔이라 할 정도 되는 양이다. 그래서 제법 내렸다 하면 일시에 교통대란이 생겨난다.

전국에 한파 주의보가 내린 오늘과 내일.

점퍼를 걸치고 편의점으로 숙취 음료를 사러 나갔더니 진눈깨비인 듯 싸락눈인 듯한 눈가루가 흩날렸다.

아랫 지방의 눈은 귀하다.

그 눈을 잠시 내려와 있는 동안에 맞이했다.

2021년 마지막 전날 밤.

가녀린 눈발검은 바다와 산과 그곳에 깃들인 사람들의 꿈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부산역과 초량은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인 김민부 시인과 가수 나훈아와 음악감독 박칼린의 고향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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