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항만에 진눈깨비가 내린다
수많은 조각 눈들은
바다 위의 북항대교를 돌아
이리저리 파헤쳐진 나대지를 지나고
땅 위에 길게 누운 철로와 도로를 건너
높은 빌딩 사이로 재빨리 빠져나간다
전조등을 밝힌 차량 앞에서
활짝 손짓하며 하얗게 흩날리다가
기차역 건너편 텍사스 거리와
차이나타운으로 쏟아져 들어가서
붉은색 조명 클럽 앞에 선
짧은 치마 입은 이국 아가씨들의
눈동자에도 점점이 내려온다
그리곤 언덕 이바구길을 따라
초량교회와 성당과 소림사를 지나
수백 개의 계단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그 길을 날마다 오르내렸던
흰 얼굴의 키 작은 모든 이들을 추억한다
늙어 구부러진 나무 아래
한 칸 성황당을 지나
산복도로 골목골목을 훑어 밟아
나훈아의 색 바랜 레코드판 노래를 듣고
김민부의 기다리는 마음으로 간절해졌다가
산 중턱 모퉁이 길
어느 노파의 빈 의자 위에 털썩 내려앉는다
잠시 후 나부끼던 눈은 다시 일어나
산꼭대기 허름한 집의 살림살이를
아린 눈빛으로 하나하나 헤아려보다가
마침내 등성이를 넘어 골짜기 아래로 달려 내려간다
12월 끝의 어두운 밤은 아쉬운 듯 눈을 지어내고
산동네 사람들은 켜켜이 맞닿은 지붕 아래서
저마다 하얀 꿈을 빚어낸다
* 남녘 부산에는 일 년에 한두 번 눈이 내린다. 그것도 중부 지방에 비하면 찔끔이라 할 정도 되는 양이다. 그래서 제법 내렸다 하면 일시에 교통대란이 생겨난다.
전국에 한파 주의보가 내린 오늘과 내일.
점퍼를 걸치고 편의점으로 숙취 음료를 사러 나갔더니 진눈깨비인 듯 싸락눈인 듯한 눈가루가 흩날렸다.
아랫 지방의 눈은 귀하다.
그 눈을 잠시 내려와 있는 동안에 맞이했다.
2021년 마지막 전날 밤.
가녀린 눈발은 검은 바다와 산과 그곳에 깃들인 사람들의 꿈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부산역과 초량은 가곡 기다리는 마음의 작사가인 김민부 시인과 가수 나훈아와 음악감독 박칼린의 고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