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글 올리는 일이 뜸해졌다. 여러 작가들의 글 읽는 일 또한 뜸해졌다.
글쓰기가 뜸해진 가장 큰 이유는, 글을 쓰고 보면 이전 글과 흡사해서 참신함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즉, 소재와 표현의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물론 내 개인사의 모든 것을 흥미진진하게 그려 볼 수도 있겠지만 그에 대한 비평을 감당할 용기가 충분하지 않다.
그리고 살며 경험한 일들이 모두 아름답거나 교훈적인 것은 아니었다.
또한 돌아보면 개중에는 윤리적이지 않은 일도 있었다. 그 와중에 글 쓰는 나 자신을 돌아보니 경험을 각색하거나 나 의미 있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하여 애쓰는 모습이 보였다.
글 쓰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의식되었다.
더욱이 운 좋게 출판의 기회가 찾아오고 경제적 소득까지 생긴다면, 이라는 가정이 글쓰기를 더욱 어렵게 만든다.
자기 계발서로 높은 판매고를 올린 작가는 정작 자기 계발에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출판과 판매에 성공한 사람이 아닐까라는 회의도 든다.
이런 생각은 어느 정도 사회생활을 해본 이라면 충분히 품어볼 만하다.
언사의 현혹은 이 시대에도 종교집단에서, 비즈니스 세계에서 위력을 발휘한다.
이런 면에서 나의 글쓰기가 어느 선까지 가식으로 위장하지 않고 진실을 유지할지는 자신할 수 없다.
지은님이 <엄마의 자리> 글에 댓글을 남겼다.
부모님은 나를 낳아주고 양육해주신 존재 이상으로 내 삶의 본보기이자 숙제이다.
내 생의 울타리이자 넘어서야 할 담장이다.
그런 부모가 어느 순간 가족 내 약자로, 보호를 받아야 할 구성원으로 변해 간다.
그런 가족 내 구조 변화에 준비되어있는 경우는 별로 없기에 혼돈과 갈등이 증폭되며 서로 간에 오해가 쌓이게 된다.
물론 모든 가족 구성원이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가장 큰 내상을 받는 이는 고령과 질환으로 서서히 무너져가는 나이 든 부모이다.
그들은 아주 작은 일에도 슬픔과 노여움을 표하고 불필요한 표현을 반복한다.
급격하게 초라해져 가는 부모를 처음 대하는 자식들은 당혹감과 동정심과 짜증으로 감정이 뒤범벅되기 쉽다.
그리고 두세 배로 무거워진, 자신을 내리누르는 일상의 무게로 허덕이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내가 깨닫게 된 것은, 모든 존재는 처음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다.
나의 어머니는 긴 세월 정신적 안식처였다가 나의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10대 소녀로 돌아갔다.
그리고 점점 일거수일투족을 지켜주어야 할 아기로 변해 갔다.
그때 어머니의 건강했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모든 역할은 변해 간다는 것, 따라서 어머니이지만 아기 어머니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때부터 내 어린 딸이 라면 기꺼이, 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러자 겪어야 할 모든 과정의 힘듦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아기 같은 얼굴로 평온히 임종을 맞이 하셨다.
가시는 분들이 남겨주는 삶의 가르침뿐만 아니라 어린 생명들이 수시로 전해주는 교훈도 있다.
지은 님은 어린 아들이 주는 기쁨과 여러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다.
새싹들이 주는 순수한 에너지는 지친 삶을 정화시킨다. 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은 나의 어긋난 시각을 교정해준다.
때로 그들의 고집과 떼씀은 나의 인내력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알게 해 준다.
결국 그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자란다는 것을 알게 된다.
때로는 그들이 나를 가르치고 있음을 자각한다.
William Wordsworth는 한 꼭지 깨달은 시인이다. Rainbow의 한 구절이다.
<The child is father of the man: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
이 표현은 역설같이 보이나 진실 그대로이다.
부모님과 아들 딸들이 모두 인생길의 스승이다.
오늘 내게 댓글로 대화를 걸어온 지은님도 브런치라는 길 위에서 만난 스승이다.
(아무리 공개된 댓글이라도 모든 분들께 허락을 받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 절차를 건너뜀에 있어 님들의 이해를 구하는 바이다. 물론 공개를 원치 않으시는 분은 바로 연락 주실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