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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형 Aug 16. 2023

흐른다는 것

 

자주 안부를 물어보는 친구가 톡을 했다. 종종 카페에서 직접 로스팅한 원두를 거저 보내주는 절친이다. 그것도 매번 박스채로 택배가 온다. 여러 개의 전용 밀폐봉지에 담겨. 그때마다 왕복하는 번거로움까지 덜어주려는 배려심에 감동하고 만다.


그동안 소일거리 삼아 하던 일을 그만두었다.

그런 일상의 변화를 아는 그였다.

- 이천으로 점심 먹으러 올래?

   근처에 한우 전문 식당이 새로 오픈했어.

육고기 애호가는 아니지만 그의 따뜻한 음조에 마음이 움직였다.


세 번을 갈아타고 가는 길.

그의 초대가 아니었으면 지하철 노선도에 강경선이 있는 줄도 몰랐을 것이다.

청계산입구역에서부터의 모든 노선의 정거장은 생각보다 한참씩 멀다. 그리고 판교에서 갈아탄 강경선 열차는 옛 기차처럼 지상의 도시와 마을과 산과 들을 지나간다. 서울의 어두운 지하 터널을 달릴 때와는 감상이 사뭇 달라진다. 이때는 당연히 지하철이라도 부를 수 없다. 굳이 이름하자면 수륙양용차처럼 지상과 지하를 넘나드는 만능철이라고나 할까. 열차가 외곽으로 멀리 갈수록 객차 안은 한산해졌다. 한참 후에 목적지인 부발역에 도착했다. 다음 역은 수많은 업적으로 칭송 받는 조선조 4대 왕이 잠든 세종대왕릉역. 도성에서 아주 먼 곳에 능지를 마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례를 치르고 상여를 이곳까지 운구했을 민초들. 그들의 노고는 과연 어떠했을까...


역까지 픽업을 하러 온 친구 차에 올라 카페로 향했. 키가 더 커진 목백일홍은 꽃송이도 풍성해졌다. 카페 뒤로 흐르는 계곡 옆 벤치에 앉았다. 어릴 적 보았던 그 맑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었다.

- 혹시 이 계곡물에 가재가 살까?

그저 희망사항으로 물어본 것에 불과했는데.

- 그럼, 겨울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골짜기라서 살고 있지.

그 말을 듣자 갑자기 계곡물에 들어가 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지난 5월에 오픈했다는 식당 건물은 1층이 신선정육점, 지하층이 식당, 2~4층은 다른 용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우리가 고른 것은 한우채끝 투뿔.

지하로 내려가자 기본 세팅이 준비되고 불판이 달궈졌다.

내 식성을 감안한 친구는 채끝살을 천천히 구워냈다. 그리곤 잘라서 한 점씩 접시에 놓아주었다.

소금을 찍어 먹어라, 파절임과 함께 먹어라 하며 입맛에 맞는지 내 표정을 살피곤 다.

고기는 매우 부드럽고 고소했다.

사실 이렇게 내가 먹으려고 상품 한우를 직접 집어든 적이 있었을까.

미안하면서도 고마운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배불리 먹고 남은 살점으로 양파 위에 탑을 쌓았다


시원한 카페로 돌아와 카페라테를 받아 들고 잠시 앉았다가 나왔다. 둘 다 정원의 나무 그늘 아래 의자가 편다. 살짝 땀이 배는 듯했지만 푸른 하늘과 매미소리가 청량감을 주었다.

- 공자가 말이야, 도가 흐르면 도를 펼치고 도가 흐르지 못하면 도를 걷어들인다했어.

고전과 여러 도서를 탐독하는 그가 문득 말을 꺼냈다.


동양의 사서삼경에는 주역이 포함되어 있다. 주역은 도덕이나 정치 또는 문화예술을 다룬 책이 아니다.

그럼에도 위절삼편이라는 사자성어가 만들어질 정도로 공자가 아낀 것으로 알려진 서책이다.


우주의 흐름과 변화, 하루의 운세와 처신.

이를 기본적으로 이해하고 운신하지 않으면 결국 어느 것도 성취할 수 없음이다.

그래서 과거에는 혹자들이 점술서로 활용하기도 했다.

바른 도덕과 윤리와 문화도 적절한 때에 태동하고 융성하고 또 쇠퇴하기 마련이다.


지장경에도 <모든 진리는 본래 공적한 것이므로... 인연에 따라 나는 것이니...>라는 구절이 있다.

시절인연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필수 요건일 것이다.


한 때 의욕과 힘으로 밀어붙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곤 결말이 성에 안 차거나 일그러질 때는 좌절감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땐 일이 잘 풀리지 않는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일이 무르익지 않음도 열정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몸을 상하는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도와 진리란 계곡을 흐르는 물과 같지 않을까.

비가 오면 온 산이 머금어 풍성히 흘려보내

가물 때는 촉촉이 젖을 만큼만 내어주는.


시원한 수박주스를 마시고 나니 정원 한 모퉁이에 서 있는 석탑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서 보니 오래된 흔적이 역력했다.

석탑의 연혁과 예술적 가치를 놓고 이리저리 유추하다 보니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졌다.

지하철역까지 전송해 주며 각시가 한아름 챙겨준 채소와 여러 가지 반찬까지 건네주었다.

집에 와 고추를 씻어 된장에 찍어 저녁을 먹었다. 처가 고향집 장모님 된장이라는데 그 맛이 아릿하다. 연로하여 거동이 불편하신 노인의 마지막 손길이 닿은 장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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