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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김도형
Dec 12. 2020
어느 증권 브로커의 파산
잃지 않는 주식 투자법 - 부록
삼성동에서 근무하던 때이다.
-오랜만이야, 잘 있었어?
폰 속 목소리의 주인공은 오래전 대학시절의 동아리 활동으로 알게 된
선배였
다.
그때는 정서적 코드가 서로 잘 맞아서 자주 연락하며 가깝게 지냈다.
그런데 졸업연도에 동아리를 탈퇴하자 기존 활동을 계속하던 회원들과는 자연스럽게 하나둘 연락이
끊겨 그 선배와도 멀어졌
다.
근 10년 만의 연락이었다.
그동안은 간간이 소식 만들었을
뿐이
었다.
-
어? 반가워요, 형!
그런데 제번호는 어떻게 아셨어요?
예전 대학시절 각별하게 지내던
두세
명 정도는 가끔씩 서로 안부 정도를 묻곤 했는데 이렇게 저렇게 하여
내 소식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선배는 지근거리인 테헤란로에 위치한 한 증권회사에 다닌다면서 조만간 맥주라도 한잔 하자고 했다.
순간 이런 류의 느낌을 받았다.
예를 들자면 아주 오랜만에 어느 친구가 전화해서,
-
나, 모 보험사로 자리를 옮겼어. 함 보자~
혹은 모 은행 대출계에 근무 중인 후배가
-선배님, 안녕하시죠?
다음 주에 식사 한번 해요~
비즈니스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직종에 종사하다 보니 이런 식의 연락엔 심리적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런데 그 후로도 한동안 그 선배로부터 연락이 없었다. 잊을만한 때에 다시 전화가 왔다.
-
내일 퇴근 후에 시간 괜찮지?
다소 경계심은 들었지만 아주 피할 일은 아니었다.
그때는 6백만 원이었던 초기의 증권투자금 규모가 이삼 년 사이에 거의 열 배로 늘어나 있었다.
일정한 투자계획 없이 즉흥적으로 증액한 결과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혼자만의 역대급 투자 토네이도를 경험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중엔 자산가치가 줄어든 종목을 들고 숨 고르기를 하고 있었다.
물론 속앓이를 하면서.
예전 대학 동기와의 일화이다.
아주 친하게 지내던 셋이 졸업 후 몇 년 만에 종로의 피맛골 주점에서 만났다.
그 중한 친구는 졸업 후 페이가 센 지방
의
한 사립 특성화고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모
대기업의 기숙사형 학교인데 방과 후에는
학부모들
의 요청으로 소규모 그룹지도를 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우리보다 수입이 거의 두배나 많았다.
우리가 궁금해하자 번 돈을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수익도 꽤 된다고 했다.
일종의 자랑질이 느껴졌지만 친한 사이라 불편한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러 그 친구가 서울의 공립학교로 옮겨 왔다고 연락이 왔다.
여러 모로 재주가 많은 친구였다.
다시 셋이 모여 한잔 하며 근황을 물어보니
너무 과하게 움직이며 번 돈은 내 돈이 아니란다.
그리고 투자했다던 주식 건을 묻자 손사래를 치며 아예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그동안 그 친구의 자랑으로 생겨났던 작은 자괴감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때는 내가 막 주식을 시작하게 된 시기였다.
퇴근 후 그 선배를 만난 곳은 삼성역에서 가까운 테헤란로 바로 뒷골목에 위치한 호프집이었다.
다소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많지 않았다.
그가 자주 찾는 단골 맥주집이라고 했다.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몇 시간 후에 헤어질 때까지 예상과는 달리 그는 전혀 주식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간간히 만나서 학창 시절을 회상하며 즐겁게 시간을 보냈는데 그는 변함이 없었다.
몇 번의 만남 속에 순수했던 시절의 기억을 상기하자 일종의 행복한 유대감이 솔솔 생겨났다.
다시 만난 어느 날 그는 문득 말했다.
-
혹시 주식하는 거 없어?
있으면 내가 관리해줄게.
최소한 손해 보는 일은 없게 해 줄게.
그때 없다고
했어야
했는데
술김에 손실을 본채로 잠자고 있는 계좌가 있음을 털어놓았다.
그는 신뢰
감
어린
표정으로 날 바
라보며 잘 생각해보고 맡겨주면 최선을 다해 관리해주겠다고 했다.
분위기 탓인지 고객예탁금 관리가 생명인 그를 도와줘야겠다는 쪽으로 마음이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단
몇 가지 조건만 충족한다면.
며칠 후 모 증권사 테헤란로
지점의
그의 책상에서 나의 요구대로 각서를 작성했다.
당시 내가 가진 수천만 원에 달하는 한 종목의 주식을 드디어 그에게 맡겼다.
각서의 주된 내용은 바로 이것이었다.
<예탁주식을 운용하되 잦은 매매를 삼갈 것.
그리고 매매하기 전에는 반드시 나의 동의를 구할 것>
그러나 그것은 증권맨의 본능에 상반되는 요구이었으며 결코 지켜질 수 없는 조항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까지는 채 몇 달이 걸리지 않았다.
답답하게 횡보하던 주식시장이 드디어 상승세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단히 말해서 몇 개월 전에 내가 보유했던 주식 가치는 이미 2,3천만의 수익을 올렸을
시기였
다.
그동안 특별한 연락이 없던 그였기에 전화를 걸었다.
-
형, 지금 수익이 정확히 얼마나 되죠?
그는 잠깐 동안 대답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가 답한 내용은 미안하게도 반토막이 났다는 것이었다.
순간 분노가 치밀면서 배신감에 제대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띄엄띄엄 말을 이어갔다.
유망한 종목을 찾아내서 여러 번 좋은 기회를 맞았지만 매매 타이밍이 좋지 않아 결과적으로 이렇게 되었다고.
<아니, 각서와 다르게 나에게 연락도 없이 수없이 매매를 일으켰다고?
이 인간이 사기꾼과 매한가지로구나.>
그러나 시간이 흐른 후 되돌아보니 배고픈 늑대에게 고기를 내어준 뒤,
나중에 내가 허락하면 먹어~라고 말하곤 외출한 꼴이었다.
직장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틀 후 각서를 들고 선배가 근무하던 해당 지점의 관리자를 찾아갔다.
각서를 내보이고 선배와 증권사에 대해 손실분에 대한 법률적 책임을 묻겠다고 했다.
그러자 무표정한 커리어우먼으로부터 기가 막힌 답변이 돌아왔다.
-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분은 저희 증권사의 정식
직원이 아닙니다.
단기계약직으로 책상을 빌려주고 성과에 대해서만 이익을 공유할 뿐입니다.
법적으로 저희 회사는 책임질 부분이 없습니다.
두 분이 직접 해결하실 문제입니다.
그 순간 천박한 자본주의의 썩은 냄새
가
사무실에
가득 진동하는 듯했다.
저 여자도 집에서는 어린 자식에겐 바르게 살아야 한다라고 가르치는 한 엄마겠지?라는 의문과 함께 삶의 부조리가 실물처럼 느껴졌다.
어쩔 수 없이 선배에게 강하게 어필했고 그는 일주일 뒤에 이것이 최선이라며 간신히 빌렸다는 1천만 원을 추가로
송금해주었
다.
증권맨은 기본적으로 매매를 일으키며 고객의 돈을 키운다.
때로는 손실이 나기도 한다.
그러나 약세장에서도 그들의 매매는 계속된다.
매매 시
발생하는 수수료가 그들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사건은 이런 핵심을 놓친 나에게 귀책사유가 있었다.
그 이후로
다
시는 증권사의 전망, 펀드 판매, 파생상품 선전 등 모든 것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차라리 내가 직접 거래를 하며 잃더라도 그것이
속 편한
일이었다.
그 이후로도 파란만장한 나의 주식 생활은 계속되었다.
2년 뒤에 절연하다시피 한 그 선배로부터 다시 연락이 왔다.
이미 시간도 흘렀고 미안해하는 선배를 아주 외면할 수는 없었다.
그의 옷차림새는 허름했다.
그는 술 한잔을 들이켜더니 묻지도 않은 내용을 조용히 뱉어냈다.
그 당시 그는 본가 및 처가의 돈까지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봤으며 이로 인해 별거에 들어갔단다.
나와의 사건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증권사를 그만두고 지방 어느 산골에 칩거했단다.
그사이 이혼에 이르게 되고 자신은 은둔하면서 젊은 날의 쓰라린 실패를 기록으로 남겼단다.
그리고 학창 시절의 꿈대로 모 문예지에 응모하여 소설과 시로 등단했단다.
이 기막힌 사연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한때의 원망이 연민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또 한 번
현실은 픽션보다도 난해하고 비극적이라는 명제가 또렷이 각인되었다.
사실 그는 석사까지 마친 명문대 불문과 출신의 문학도이었다.
그래서 증권사 사무실에서 그와 마주 앉아 효력도 없는 서류를 작성할 때 몹시
도 생
경했었다.
최근에 신종 코로나
사
태 이
후에 그의 연락처를 겨우 알아내 전화를 걸어 보았다.
예전에 그의 강권으로 동학혁명 시절 특이한 족적을 남긴 강증산 선생을 신앙하는 단체의 강남지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증산 선생은 후천 선경 세계를 열기 위해 선천 세계의 악업을 정화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 도구가 바로 병겁인데 그로써 모든 세계의 질서를 새롭게 재편한다고 했다.
또한 그 과정을 통해
남
조선국이 세계 상생 일류국으로 발돋움한다고 예언했다.
전화기 너머의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고향에 정착했다는 그로부터 병겁에 대한, 이 시대의 팬데믹에 대한 의미 있는 견해를 들을 수는 없었다.
단지 개인적인 신앙은 아직도 유지한다고 했다.
통화는 짧게 끝났다.
무언가 아쉬움이 느껴진 탓에 작별
인사 후에도
쉽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우린 금전의 격랑 속에서 귀중한 우정을 지켜내지 못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일 뿐이었다.
이 쓰라린 결론이 내 생의 한 페이지에 기록으로 남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누구는 지나간 모든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다.
이
일도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그리 기억될
수 있을
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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