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우리의 수명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수명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나니..." (시편 90:10)
스웨덴 출신의 Alfred Nobel은 사용과 관리가 편리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고 총 350여 개의 특허권을 소유하며 천문학적 재산을 축적하였다. 그는 말년에 노벨상을 제정하고 거액의 유산을 기탁하였는데 이 같은 결정을 내리는 데에는 한 신문사의 보도가 계기가 되었다. 그 보도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죽음의 상인 숨지다.
이전보다 빠른 방법으로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하여 부자가 된 알프레드 노벨 박사.
어제 사망하다.
이 부고는 그의 형 루드빅 노벨이 칸느에서 사망했을 때 프랑스의 한 신문이 내보낸 오보였다. 이 보도를 접한 알프레드 노벨은 부고 내용에 충격을 받았다. 이전의 남동생과 직원들이 숨진 폭발 사고에도 깊은 슬픔을 느꼈던 그는 7년 뒤인 1895년에 노벨상 제정에 서명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에 이탈리아에서 뇌출혈로 사망하였다. 신문을 통해 미리 본 후대의 평가가 노벨의 재산 기부 결정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다. 물론 그에 대한 사후 평가는 위 부고 내용과는 사뭇 달랐다.
산다는 것은 하루하루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것이다. 죽음의 때가 시간상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면 하루를 지날 때마다 그만큼씩 삶의 길이가 단축된다.
태어날 때는 울지만 죽을 때에는 웃어야 한다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태어날 때의 모습은 만인 공통이지만 생의 마지막 모습은 만족과 기쁨과는 거리가 먼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죽음의 순간은 매일 찾아온다. 저녁에 돌아와 안도와 감사의 시간을 가지며 다음날 아침을 소망하는 시간에도 찾아온다. 죽음은 조용히 우리를 지켜보며 지나간 하루의 무게를 달아본다. 그리고 때때로 아쉬운 표정으로 밤의 자리를 지키다가 떠나간다. 그렇게 대면의 시간은 매일 일어난다.
아니 매 순간 일어난다.
죽음은 성찰이라는 거울을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낸다. 삶이 너무 고단하거나 자극적인 경우, 그를 알아차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만다. 그래서 때로는 삶이라는 열차에서 잠시 내려야 한다. 짧은 휴직이든, 피정이든, 템플 스테이든, 명상 프로그램이든, 독서든, 여행이든, 취미든 자신의 영혼이 순수한 눈과 이성을 회복할 시간을 가져야 한다.
알고 보면 탄생과 죽음은 한 몸이며 시간에 따라 모습을 달리할 뿐이다. 죽음은 마지막 순간에 마중 나와 영원한 안식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로마의 개선장군이 행진할 때 노예가 앞에서 소리 높여 외치던 구절. 승리에 취한 나머지 정도를 벗어나는 일이 없도록 죽음을 상기시킨 것이다. 높아진 것을 낮춤으로써 평균율을 유지했던 로마인들의 지혜이다.
이미 낮아진 사회적 자존감은 어떻게 높여야 평균율을 맞출 수 있을까? 전 서울 시장의 사망 사고를 냉소로 대하기보다는 존중으로 대하는 것이 공동체의 가치 보전에 득이 될 것이다. 굳이 로마식으로 표현하자면 이와 같을 것이다.
너희도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나니...
현실 세계에서 이상을 추구하면서 거친 꿈을 꾸다가 쓰러진 그. 그가 죽음으로써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로 인해 피해를 보았을지도 모르는 익명의 존재들이 위축되지 않고 권익을 회복하는 세상의 실현일 것이다. 물론 그 과정은 지난할 것이다. 수많은 구설과 법률적 논쟁과 당사자와 가족의 심리적 고통을 동반할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순수한 희망이 일부분 훼손된 현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지장경에 이런 구절이 있다.
"... 마음을 바르게 하고 미친 마음으로 시비를 벌이지 않으며 상과 벌을 놓아버리고..."
성현의 도를 닦진 않아도 공동의 선을 위하여 과열된 시비지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고인을 추모하고 고소인의 존엄을 지키는 길이다. 지나친 논쟁이 지속될수록 당사자들은 우리네 저녁 식탁의 한가운데서 조금도 내려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