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도형 Jan 24. 2021

2021 올해 운세는? 운수대통!

일상이 대통인 까닭


- 내가 보내준 운세 사이트 들어가 봤수?

-- 아니. 왜?

- 무료라서. 심심할 때 함 보라고.

-- 알았다. 근데 봤어? 네 건 뭐라고 하든?

- 21년도엔 부귀와 영화가 하늘에 닿아 대통한다네, 카~

-- 점괘가 좋으니 다행이구만.

- 올해는 행운이 좀 따르려나?

-- 음, 그래야지. 그런데 사실 아무 일만 없어도 운은 좋은 거야. 인생사 길흉화복이 기본 메뉴고 일 년이란 기간도 짧지 않으니 무슨 일인들 안 생기겠어?


며칠 전 부모님 제사 건으로 동생과 통화 끝에 나눈 대화이다. 제사는 코로나로 인해 최소한의 인원만 모여 지내기로 했다.




지난주에는 수도권의 코로나 확산으로 지방 도시에서 열흘이 넘게 머물렀다. 그러나 강추위가 계속되자 거처 관리가 걱정되었다. 돌아와서 짐을 정리하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울렸다. 귀가한 지 채 한 시간도 되지 않았다.

문 밖에는 우편 배달원이 등기 우편물을 들고 서 있었다.

편지 봉투를 쓱 보니 근처의 주거래 은행 지점에서 보낸 것이었다. 가끔 연말이면 지점장 이름으로 연하장이 날아오곤 했기에 그런 종류의 우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일부 은행에서는 적금이나 대출(!)이 많은 고객에게는 형식적이나마 렇게 인사를 다.

등기로 온 것만 빼면 이상한 점이 없었다.


테이블에 우편물을 던져놓고  정리를 마무리다. 대충 저녁까지 먹고 봉투를 뜯어본 시간은 8시쯤.

연하장과 크기가 다른 봉투는 무언가 느낌이 심상치 않았다. 

ㅡ 뭐, 별 일이 있겠나...


봉투에서 나온 종이는 단 한 장.

인쇄된 A4 용지 어디에서도 인사말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로로 인쇄된 용지 상단의 제목은,


000님 대출 내역서》


ㅡ 이것이 무슨 일?

내용인즉 2017년부터 2020년 12월까지의 대출건에 대한 납부 금액, 이자, 잔금 등의 기록이었다. 여러 건의 대출 내역은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았다.

대출은 총 7건이었고 최초에 3,500만 원, 이후에는 500만 원과 1000만 원을 오가면서 총액은 7,700만 원을 넘은 상태이었다. 그래도 일부는 상환하여 총잔액은 5,500만 원으로 줄어 있었다.


서류를 자세히 살펴볼수록 긴장감이 높아졌다. 동시에 자가 검열 시스템이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N 주거래은행에서 대출을 활용해왔다. 그리고 몇 번은 주식 대금으로 잠깐씩 마이너스 계좌를 이용했었다.

그러나 현재는 대출금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인가 관리가 잘못했고 이를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혹시 우편물 피싱?

전에 한번 완벽에 가까운 보이스피싱으로 멘붕에 빠진 적이 있었다. 그땐 막판에 오기가 생겨 직접 경찰서와 검찰청을 찾아가서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바람에 피싱 조직원들이 화를 내며 끝난 일이 있었다. 결론적으로는 내가 프로 연극팀을 30분간의 공연 끝에 물 먹인 셈이었다. (이 에피소드는 나중에 자세히 풀어볼 생각이다 )


봉투에 적힌 전화번호와 인터넷상의 전화번호를 대조해보니 같은 번호였다. 그렇다면 피싱용은 아닌 것 같은데 늦은 시간이라 전화로 확인하기 어려웠다.


순간 절친 N 은행 지점장이 생각났다. 9시가 약간 넘었기에 실례가 될 줄은 알았지만 다른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친구는 이야기를 듣더니 일단 내역서를 찍어서 전송하라고 했다.

그의 아내가 갑자기 옆에서 피싱이 분명하다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서 절대 봉투에 적힌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친구는 다음날 출근하면 해당 지점에 연락해서 내용을 알아보겠노라고 했다.

얘기 끝에 해당 지점이 집에서 가까우니 다음날 오전 중에 내가 직접 방문해서 확인해보는 것이 확실하겠다고 말하곤 전화를 끊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떴다. 물론 밤잠을 설쳤다. 여타 은행 부채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일이 꼬일 경우 5천만 원이 넘는 금액을 부채로 떠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오래전에 일산 오피스텔 분양 붐이 한창일 때 사인 한 번으로 구경도 못한 대출 중도금이 은행에 부채로 차곡차곡 쌓이는 지옥을 경험했었다.


왜 지옥이냐구요?


분양 직후 청구 건설사가 전국적으로 수천억의 부도를 내고 파산했기 때문이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명한 피분양자들에게 돌아왔다. 그 후 피해 복구 비상 위원회에 참가하여 활동하는 기이한 경험도 했다.

(이 또한 상, 중, 하 시리즈 이야기 감으로 다음을 기약해야겠다)


얼마 전의 라임 사태가 떠올랐다.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인생이다.

다음 포털의 백과사전에는 라임 사태를 이렇게 정의했다.

라임 사태(라임 자산운용 사태)는 부실한 사모펀드가 무너지면서 약 1조 6700억 원의 피해가 발생하고 4000여 명의 피해자가 투자금을 잃은 사태다.


아침밥을 꼭꼭 씹어 먹고(사실은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은행 개점 시간에 맞춰 외출할 준비를 했다.

만약 실제 대출이 없는 전상상의 오류라 하더라도 이를 시정하려면? 그때는 내가 직접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복잡한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갈 준비를 마치자 그래도 미리 전화로 자초지

종을 들어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ㅡ 00 지점이죠? 대출계를 부탁합니다.

- 네, 대출계입니다.

대출 내역서를 등기우편으로 보낸 것 맞나요?

전 대출을 모두 상환해서 대출잔액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 000님 맞으신가요?

ㅡ 네, 맞아요.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나요?

저기 주소가 논현동 아닌가요?

ㅡ 네? 아닌데요...

- 아... 동명이인이라 잘못 안내장이 송부된 것 같습니다. 죄송합...


뒷얘기는 잘 들리지 않았다. 힘이 쭉 빠졌다.

ㅡ 저기요, 지금 IT 시대에 타인의 금융 정보를 이렇게 발송한다구요?

내가 지금 은행에 갔으큰소리쳤을 텐데 정말 어이가 없어서... 

더 이상 말도 하고 싶지 않네요.


간밤에 여러 가지 상황을 예측하면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그 잠 못 든 시간을 생각하니 분이 풀리지 않았다. 잠시 후 친구가 걱정하며 전화를 걸어왔다.

- 어떻게 좀 알아봤어?

ㅡ 야, 세상에 너네 N 은행은 무슨 일을 그 따위로 하냐?

그 친구는 해당 은행에 근무한다는 이유 하나로  애꿎게 내 분풀이를 받아내야만 했다.






이상한 일만 닥치지 않아도 다행이다.

아무런 일이 없으면 평타가 아니라 행운인 것이다.

한 때 주식으로 돈 좀 벌었다는 친구가 있었다. 한참 후에 만났을 때에는 주식의 주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나 처음에는 그의 자랑으로 나머지 친구들이 우울했었다. 지나고 보면 타인의 성공을 행운으로 기준 삼는 것이 애초에 잘못된 것일 수 있다.

가족이 있고 할 일이 있고 티브이 드라마라도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큰 행운없겠다.


등기 우편 건으로 정말 그런 생각을 했다.


지금은 코로나 사태로 고통받는 이들이 많아졌으니 과거의 평범했던 일상이 더욱 의미심장해졌다.


의도치 않았던 과실의 결과 나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전혀 맥락 없는 사건도 우리 주변을 맴돌며 영향을 줄 수 있다.


올해는 모두에게 운수대통을 빌어본다.

별다른 행운이 아닌 소중한 일상이 지금 이만큼이라도 지켜지길 간절히 기원하는 휴일 저녁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