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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하기보다 문제 해결책을 말한다는 사람들의 속마음

나의 희로애락을 물건을 대하듯이 판단하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는 공감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책을 말하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공감이란 무엇일까.


자녀가 어려운 일을 겪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하며 가슴을 친다.

“자식이 겪는 어려움을 내가 겪어야 하는데.”

어머니는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


첫째, 어머니에게 자식의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전달된 아픔이 너무 커서 오히려 그 아픔을 자신이 겪는 게 낫다고 여기는 것이다.


둘째, 어머니는 그 자식을 낳았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내 속에서 나온 그 자식은 나의 일부 혹은 전부가 되어버렸다. 그러니 자식은 곧 나이다. 자식의 모습에서 나를 보니, 자식이 겪는 고통이 내가 겪는 고통이 되어버린다.


셋째, 어머니는 자식에게 관심이 있다. 자식에게 관심이 없는 어머니라면 저런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관심은 곧 사랑의 특성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관심이 가고, 관심을 갖고 보니 더 사랑하게 된다. 내가 사랑하는 존재가 아플 때, 나 역시 아플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자식의 아픔에 온전히 공감하고 있다. 왜냐면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공감은 이런 것이다.

사랑을 기반으로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 되는 것이다.

물리적으로 별개의 존재라는 진리를 뛰어넘어 타인의 아픔을 스스로 내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는 공감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책을 말하는 편입니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실체는 뭘까?


무엇이 그들을 공감이라는 거룩하고 신비로운 작용을 생략하고, 기계처럼 문제 해결책만을 이야기하도록 이끄는가?


ATM기기에서 카드를 넣고 비밀번호를 누르면 돈이 나온다. 고객이 ATM기기를 사용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돈을 인출하기 위해서다. 돈만 인출하면 그들은 기기 앞을 떠난다. 용건이 끝났기 때문이다. ATM기기가 고장 났다면, 다른 기기를 사용하면 된다. 그냥 아무 기기나 돈만 제대로 나오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ATM기기와 대화하지 않는다.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감정을 교류하지 않는다. 물질적인 필요만 충족되면 그만이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간의 대화는 ATM기기를 사용하는 행위가 아니다.


대화는 더 고차원적이고 역동적인 무엇이다. 돈이라는 이익이 없어도 우리는 대화하며 공감한다. 공감을 한만큼 상대는 돈을 주지 않는다. 공감은 이익을 위한 게 아니다. 공감은 온전히 사랑에 헌신된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공감을 잘하지 못하면, 문제 해결책도 잘 말하지 못한다.


공감은 문제 해석하면서 따라오는 감정의 시그니처이다. 문제의 본질과 그 문제를 대하는 사람의 심정까지 알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 자신의 일도 아닌데,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생각하고 연구한다. 누가 그만큼 보상하지도 않는데, 그들은 스스로 고생길을 떠난다. 그 사람의 아픔 때문에 자연스럽게 내가 힘들다.


문제 해결책을 내기 전에 문제를 해석하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된 문제 해결책이 나온다. 문제 해석이 없는 해결책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공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현명한 문제 해결책도 내지 못한다.


따라서 “저는 공감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책을 말하는 편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사실 공감도 못하고 제대로 된 문제 해결책도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게 그 사람들의 실체이다.


A는 일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친절한 동료들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정했던 동료들은 A를 보면 인상을 찡그린다. 밥도 같이 안 먹는다. 딴 세상에 홀로 떨어진 것 같은데 아무도 그 마음을 짚지 않는다.


어느 날, A가 B에게 고통을 토로한다. A는 간략하게 처한 상황을 나누고,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런 A에게 B가 말한다. “이제는 (관심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해.”


이게 무슨 의미일까? B의 의도는 이렇다. 늘 사랑만 받을 수는 없다. A가 서운한 근본적인 이유는 사랑을 받으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힘들어도 이제는 사랑을 주는 게 더 좋은 것이다. 사랑을 받지 못함에 집중하지 말고 사랑을 주는 행위에 몰두해야 한다.


그럴듯한 말이다. 사람을 배제하고 이 말만 딱 떼어놓고 보자. 그럼 이 말을 한 사람은 꼭 중요한 무언가를 깨달은 현자 같다.


그런데 이 사람이 정말 현자일까?

도대체 이 사람은 A가 일 때문에 위축되고 동료에게 외면받아 괴로운 심정에 관심이나 있는 걸까?


사랑은 텍스트가 아니다. 공감은 텍스트가 아니다. 저 말을 밋밋하게 읊조리는 자칭 현자는 저 말이 이 상황을 이겨낼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모른다. 자칭 현자가 잘못짚었다. A는 일방적으로 사랑을 받으려는 욕심쟁이가 아니다. 사랑을 갈구하는데 그 사랑을 받지 못해 힘들다는 게 아니다.


누구라도 A의 입장이 되면 괴롭다. 일을 따라가지 못해서 자괴감이 든다. 일을 잘해야 하는데 일을 못해서 피해를 주는 게 속상하다. 쓸모없는 인간이 된 것 같다. 따라서 동료들의 변심에도 A는 할 말이 없다.


이런 A에게 정말 "사랑을 주는 역할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 적합한 말일까? A는 사랑을 주는 걸 이미 좋아하고 있다. 오히려 현재 A의 사랑을 받을 사람이 없다. 동료들이 A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 A이고, 그런 사랑을 미리 거절당한 사람이 A이다.


A는 미움받는 게 힘들어서 괴롭다는데, 자칭 현자는 "사랑받고 싶어 하는 응석받이"로 A를 부족한 사람인 것처럼 멋대로 낙인찍으며 설레발친다.


C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네가 겪는 일보다 더 힘든 일도 많아.” 그럴듯한 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사실일 것이다. 중요한 건 A는 자신이 가장 힘든 일을 겪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리고 세상에 이보다 힘든 일이 많다는 건 이미 A도 잘 알고 있다.


A가 말하고 싶은 핵심은 괴로움 그 자체이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사람이 나라는 자기중심적인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인데, A는 누군가에 의해 "세상 물정 모르고 별 것도 아닌 것에 불평하는 사람"으로 오독당하고 말았다.


공감은 강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공감은 아픈 것이다. 공감하면 결국 마음에 생채기가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상처까지 아우를 정도로 그의 품은 여유가 있기에 대가를 바라지 않고 아파한다. 자발적으로 타인의 고통에 뛰어든다.


공감을 잘하는 사람은 아픔에 의연하며, 아픔에 직면할 줄도 아는 자이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아픔이 닥쳤을 때도 아픔을 가장 건강하게 극복할 수 있는 사람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고통을 회피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도 감정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그런 태도가 이성적이고 냉철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태도로 인해 자신이 감상에 빠지지 않고 문제에 함몰되지 않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고통을 피하려는 몸부림이 있다. 감정에 직면하면 너무 아프기 때문에 무언가 느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


아픔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준다. 인간 안에 있는 보석 같은 감정들이 출렁일 때, 인간은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대가 없이 얻어지지 않는다. 인생에 대한 성찰은 반드시 아픔이라는 지독한 병마를 필요로 한다.


아픔은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아픔은 중립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아픔 때문에 인간은 멸망하기도 하고, 아픔 덕분에 인간은 성장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픔 앞에 놓이는 것은 두 갈래의 길 초반에 놓인 것과 같다.


공감을 못하는 사람들은 막상 자신에게 아픔이 오면 당황하며 우왕좌왕한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네가 더 잘해야지, 사람은 이런 일도 겪어봐야 해 하던 그 무미건조한 말들이 자신에게는 영 먹히지 않는다. 남에게는 통용됐지만 자신에게는 허락되지 않는 말들이었다.


결국 남의 일은 남의 일이었기 때문에 그런 말을 했던 거다.


A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적어도 B는 일에 적응하기 힘든 이유나 A에 대한 동료들의 반응에 대해 구체적으로 질문했을 것이다. 다짜고짜 사랑을 주는 사람을 운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C도 마찬가지이다. A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었다면, 세상에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이 많다는 원론적이고 추상적인 말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좀 더 구체적으로 A가 처한 상황에 대해 물었을 것이다.


그들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들은 상황을 자세하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면서, 갑자기 무언가를 설파해버린다.


만약 누군가가 "그럼 당신은 지금 A가 어떤 게 힘든지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나요?" 하고 묻는다면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심드렁하게.

 

"A의 마음과 상황을 그렇게까지는 잘 모르는데요. 사람이 다 누구나 자기 일이 가장 힘든 거니까요. 힘들다니까 이런 말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요?"


자칭 현자들이 한 얘기는 다 어디에서 듣던 말이고 이미 들어왔던 말이다. 문제 해결책으로 포장된 그들의 말은 사실 관심 없는 황무지 같은 마음에서 나온 기계음일 뿐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갑옷을 입고 세상을 대하는 사람들이다. 갑옷을 입었다는 뜻은 세상이 언제 자신을 공격할지 모른다고 여기는 걸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갑옷을 입었다. 그들의 진짜 마음은 갑옷 안에 숨겨진 얼굴이다.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이다. 그게 그들의 진짜 마음이다.


갑옷을 입어서 얻는 이점은 단 한 가지이다. 외부의 공격에 무뎌진다. 갑옷으로 인해 고통이 완충된다. 그래서 그들은 고통에 집중하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충격도 덜 아프다. 그리고 항상 똑같은 얼굴로 타인에게 "저는 괜찮습니다."라는 인위적인 메시지를 보낼 수 있다.


그들은 날 것 그대로의 마음을 타인에게 내어놓은 적이 별로 없다. 만약 그렇게 하면 공격당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진심을 말하는 게 낯설다. 갑옷 바깥의 삶을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갑옷을 벗기 꺼려하는 사람들이다. 평소에도 갑옷을 입고 지내며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공격에 대비해 왔다. 상처 받고 싶지 않아, 일찌감치 갑옷 속으로 숨은 게 그들이다. 그들 또한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인격적인 측면에서 공감했다면, 갑옷까지 입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들은 어쩌면 자신들이 똑똑하게 대처한다고 믿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믿음은 사실이 아니다. 그들은 갑옷을 내려놓고 공감할 만큼 상대를 귀하게 보지 않았다. 상대를 향한 진심을 보여줄 만큼 자신의 마음을 열지 못했다.


그러므로 공감을 못하는 것 자체가 그들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들은 상처 받아서 공감하지 못한다. 또한 그들은 상처 받았을 때 적절한 위로를 받은 적이 별로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고 소위 말하는 "이성적인 존재" 정도로만 머무르려고 한다.


이성적인 존재로 사는 게 제일 안전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괜히 출렁이는 감정을 내보였다가 상대에게 거절당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며 수시로 감정의 가지를 쳐낸다. 따라서 그들은 무미건조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무미건조함은 그들이 만들어낸 것이고, 그들의 자연스러운 본심은 아니다.


“저는 공감하기보다는 문제 해결책을 말하는 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결국 그들 자신은 타인의 상처로 인해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이다. 이성적인 존재로써만 정체성을 표현하며 자신만의 심리적 안전거리에 머물고 싶다는 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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