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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싫어하는 대상에게 OOO OO를 설정해야 한다

타인을 싫어해도 괜찮다. 동의가 안 되면 주관이 들어간 의견을 표현해라

누구라도 나를 싫어할 권리가 있다.

나도 누구든지 싫어할 권리가 있다. 


누군가가 싫을 때가 있다.

이유가 타당할 때도 있지만 이유가 명확하지 않을 때도 있다.

사람이니까.


예전에 나는 타인을 싫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조건 좋은 마음을 갖고, 내가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과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미워하게 되는 타인도 있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라는 게 중요하다.


내가 좋아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좋아지지 않는 대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억지로 좋아하는 '척'을 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그 사람에 대해 거부감이 존재했다.


예전에는 그런 마음 상태가 잘못됐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나도 타인을 싫어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싫어하는 마음 자체가 무조건 잘못된 게 아니었다.


인간은 긍정적인 감정만 느끼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인간은 부정적인 감정도 느끼도록 창조되었다.


오히려 무언가를 긍정하지 않음으로 '나답게' 살아간다.

마찬가지로 타인의 주장을 반대함으로 나만의 주관이 들어간 의견을 표현하게 된다.


나의 생각을 주장하려면 필연적으로 상대의 의견을 반대해야 한다.

이 둘은 양면 색종이처럼 서로 붙어 있다.


그러므로 반대는 결코 잘못된 게 아니다.

타인이 나를 미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내가 타인을 미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배제하려고 노력했다.


누군가를 싫어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정받은 적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무의식 중에 '미움'이라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경향이 생겼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할 때,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나와 성향상 잘 맞지 않아서.

상대가 너무 까칠하게 나오니까.

상대가 나를 안 좋아하는 게 느껴져서.

상대가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만 반복해서.

상대가 선입견으로 나를 대하는 것 같아서. 등등.


타인이 저렇게 행동해도 내가 그를 좋아한다면, 오히려 그게 이상한 일일 것이다.

누구든지 사람을 보는 자신만의 기준이 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행동과 싫어하는 행동이 분명히 있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행동을 타인이 반복할 때, 나는 그런 타인을 싫어하고 있었다.


또한 상대가 특별히 잘못한 게 없어도, 나와 성향이 맞지 않으면 멀어지고 싶었다.


그가 동의하기 힘든 말이나 나의 신념과 반대되는 행동을 반복하면 마음이 불편해졌다.

예전에는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억누르려고 했다.


내가 상대의 말에 동의하지 않거나 상대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말했을 때, 그가 시무룩해지거나 나를 배척했던 경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부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는 나의 태도가 잘못됐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나는 개별적인 인격체로 고유한 생각이 있다.

그러므로 특정 의견을 반대할 수 있다.

그런 태도는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나의 비동의는 잘못된 게 아니다.

그럴 수 있다.

나의 비동의는 예외적인 게 아니다.

나의 비동의는 고칠 점이 아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된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은 나를 특정 캐릭터로 봤던 것 같다.

특정 캐릭터란, 어떤 의견이든 수용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않으며 순진무구하게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는 예스형 로봇 인간이다.


그들은 타인의 의견에 내가 "네, 맞습니다. 다 맞습니다." 이렇게 나오길 원했다.

그들은 타인의 의견을 비판할 때도 많으면서 말이다.   


그들은 멋대로 허구의 이미지를 갖다 붙이고, 내가 그 이미지에 어울리게 행동하기를 무심코 바랐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럼없이 만든 편견의 틀을 내가 망설이지 않고 박살 내버렸다. '비판'이나 '반대'로. 

그래서 그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꼈을 수 있다.


아니면 내가 어떤 주장에 동의하지 않듯이, 그들도 동의하지 않는 나의 주관에 동의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들도 그럴 수 있다.


의견의 불일치는 인간이 모인 곳에서 비일비재한 현상이다.  

예전에 나는 노력해서 타인을 이해해보려고 애썼다.

물론 문자적인 '이해'가 아닌 '이타적인 수용'에 가깝다. 노력하면 상대와 더 친해질 거라 여겼다.

그러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타인이 나에게 타격 주는 행동을 해도 이견 없이 넘어가는 횟수가 많아졌다.

내가 용납해주는 모습을 보고 타인이 의도적으로 선을 넘기도 했다. 

나의 용납을 타인은 고맙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배려 없이 행동해도 불이익이 없다는 수신호로 그는 잘못 이해했다.


아니면 그들은 나를 친절한 응원단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무조건적인 응원에 대한 기대감을 자의적으로 증폭시켰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그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면 응원을 철회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크게 실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들을 배려했다.

배려했다는 것은, 그들이 나로 인해 상처 받지 않도록 신경 썼다는 의미다.


내가 안 좋은 마음을 타인에게 드러내면, 타인은 상처 받으니까.

타인에게 상처 주는 행동은 되도록 삼가야 한다고 믿었다.


자신으로 인해 남이 상처 받는 상황에 무감각한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쪽은 아니었다.

타인이 상처 받았다고 할 때 나는 당황했다.

여름 대낮에 도로를 걷다 행인에게 찬물을 맞은 느낌이랄까.

나의 말로 남이 슬퍼하거나 괴로워하는 게 예외적인 일로 여겼다.

생기면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내가 상처 받는 것과 엇비슷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나의 부족함이든 어쩔 수 없는 상황이든 자의 반 타의 반 누군가의 마음에 흠집을 내게 된다.  


슬프지만, 살다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럴 수 있는 거다.

역지사지를 해 보자.

속으로는 타인을 싫어하면서, 의지적으로 그 감정을 눌러놓은 채 겉으로만 잘 대해주는 행동은 선한 걸까?


속으로는 의견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동의하는 '척' 하는 게 과연 서로에게 좋은 일일까?


진실을 알게 된다면 상대는 배신감을 느낄 것 같다.

  

자신을 좋아한다고 추측했는데, 알고 보니 싫으면서도 티를 안 냈다는 걸 눈치채면 씁쓸할 듯하다.


의견에 반대하지만 상처주기 싫어서 영혼 없이 동의했다면, 나의 동의로 인해 힘을 얻었던 그가 외려 배신감을 느낄 듯하다.

물론 남에게 속마음을 안 들키면 된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다.  


깊이 묻어 둔 감정은 부유물처럼 마음 안을 유영하다 어느 순간 대지 위로 뛰어오른다.


나는 안 좋은 감정을 감춘다고 감추는데, 미세한 표정 변화나 제스처로 타인이 알아챌 때가 있다.

사실 나도 타인의 미묘한 표정을 보고 진심을 알 때가 종종 있다.

어떤 의사를 인터뷰한 적이 있었다.


상담을 많이 한 의사답게 시종일관 따듯하고 친절했다. 

심지어 처음 본 나에게 만년필까지 선물했다.


그러나 인사를 하고 헤어지면서, 그에게 섬뜩한 느낌이 받았다.

그가 나와 인사하고 뒤도는 동시에 미소를 머금은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하게 변하는 걸 봤다. '무표정'이 아니라 '싸늘하게'이다.


아, 인공적인 친절로 사회생활한 거였구나.

취재진에 대한 사무적인 예의였구나. 


잠시나마 부드러운 인상의 의사를 좋게 봤던 마음이 민망해졌다.

찰나에 타인의 감정을 어떻게 아냐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웬만하면 다 안다.

인간의 직감은 때로 신기할 정도로 기민하다.


그리고 생각보다 진심은 잘 감춰지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틈 사이로 민낯을 들이미는 게 진심의 특징이다.


친절한 말투에 콕콕 박힌 가시 같은 경계심.

무뚝뚝한 표정 뒤에 숨겨진 부드러운 연민.


입은 웃지만 희번덕거리는 눈동자가 보내는 '난 널 싫어해'라는 메시지.

무표정한 얼굴에 드리워진 분노 혹은 무시 혹은 경멸.

'그럴 수도 있지.'라는 말에 깔린 체념과 포기.

대놓고 '야, 너 나 싫어하지?' '너는 나의 행동이 이해가 안 되지?'라고 묻지 않아도 어지간하면 상대의 마음을 안다.

그리고 모른다고 해도 여차 저차 해서 결국 진실을 알게 될 때가 많다.


미움을 감춰도 미움이 드러나고, 비동의를 감춰도 비동의가 드러난다.
그럼 어쩌란 말인가.

지속적으로 미워지는 타인이 있다면 심리적 거리를 설정해야 한다. 싫어하는 감정을 팍 표출하지 말고, 무미건조하게 반응해서 상대와 거리를 둬라.

 

최대한 상대와 멀리 떨어져서 나의 이목구비가 안 보이게 해라. 내가 찡그려도 상대가 모르게끔.

최대한의 예의를 갖추되 나에 대해 최소한의 정보만 흘려라.


그럼 자연스럽게 상대는 나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느낄 것이다.

그래도 상대가 자꾸 다가온다면?


얇게 미소 지으며 어색해해라.

짧게 대답하라.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할 말이 없다는 제스처를 취하라.

개인적인 연락은 하지 말고 연락을 하더라도 사무적으로 대하라.


그럼 타인은 나를 알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다.

서서히 타인은 나를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으로만 여길 것이다.


하루에 1mm씩 멀어져라.

1mm씩 멀어지다 보면 언젠가 1km의 거리를 두게 된다.

1km의 거리가 당연해질 때까지 가까워지지 않는 시도를 반복해라.    

만약 상대의 말에 동의가 되지 않으면, 부드럽고 차분한 어조로 감정을 빼고 간략하게 의견을 표현하라.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나의 의견은 너와 다르다고 솔직하게 말해야 한다.


'너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해.'라는 메시지를 보내라.


대신 상대를 정죄하거나 통제하는 식으로 말하지 말라.

따뜻한 어조로 명확하게 의견을 표현하라.


안 그러던 사람이 주관을 드러내면, 상대는 당황할 수 있다.

자신의 기대치와 다르기 때문이다.


상대는 기분 나빠하며 나의 주장이 틀렸다고 항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의견을 수용하지 말라.

타인의 의견이 내 옆으로 지나가게 내버려 두어라.

나의 입장에서 볼 때 타인이 동의가 안 되거나 도덕적 기준에 반하는 주장을 하면, 별 것 아니라고 넘어가지 말라. 침묵은 암묵적 동의로 읽힐 수 있다.

그 순간만큼은 내 마음에 집중해서 표현을 해야 한다.


그렇게 작은 순간들을 벽돌 쌓아 올리듯 착실히 축적하라.

작은 순간들이 모여 언젠가 큰 효과를 보게 될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쌓지 말고 틈틈이 밖으로 흘려보내라.

그 감정으로 인해 인간관계가 막히지 않도록.

나를 위해서, 상대와의 성숙한 관계를 위해.


상대의 의견에 동의해야만 관계가 좋아진다면 차라리 손절을 택하라. 그 편이 서로에게 유익이다.

무조건적인 찬성을 바라는 상대라면, 그의 마음이 건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어쩌면 상대는 동등한 관계가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나의 이견을 못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런 사이는 비틀어진 인간관계라고 해석해야 한다.

어차피 누군가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할 때, 인간이니까 거절감으로 인해 상처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상처가 내 책임은 아니다.


내면의 힘을 갖춘 사람이라면 스스로 잘 극복할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의 반응에 지나치게 신경 쓰지 말아라.


부정적인 감정을 최선을 다해 부정하지 말고, 차라리 빠르게 인정해라.

그리고 대안을 찾아라.


부정적인 감정을 참기만 하면 언젠가 터진다.

질량 보존의 법칙과 같다.


세상이 요구하는 '무한대의 착함'을 거부해라.

대신 매번 나의 감정과 나의 주관을 의식적으로 선택해라.

 

한 마디로, 매너 있게 타인을 거절하라.

천천히. 조금씩. 그리고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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