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자존감 소꿉놀이를 즐기던 B를 나름 후하게 평가한 이유

"네가 한 일이 몇 점인 것 같아?" 갑자기 B가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B가

B는 나에게 물었다.

"우리 프로그램 중에서 뭐가 제일 인상 깊었어요?"

나는 약간 당황했다.

그 프로그램을 많이 보지 않았기에, 어떤 회차를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나마 한 가지 떠오르는 프로그램 제목이 있었다.

C가 제작한 D라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래서 그걸 말했다.


B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니. 왜? 본인이 물어봐 놓고.

B의 대답에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나랑 말고 C랑 일을 해야겠네."


사회생활 연차가 많이 쌓이지 않았던 내가 상대를 의식하지 않고, 솔직하게 답변했던 거였다.  


B는 중립적인 질문을 하는 척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나오길 기대했다. 내가 그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그가 만든 프로그램을 언급하길 바랬다. 그런 사람 앞에서 내가 천연덕스럽게 D를 골랐으니. B의 표정이 영 안 좋았다.


B는 제작자로서 누군가에게 그런 질문을 할 때, 자신이 만든 프로그램에 대한 칭찬을 기대할 수 있다.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나.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중립적인 질문에 사심 없이 대답했을 뿐이었다. 나는 B의 기분을 맞춰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내가 프로그램 회차를 다 안 봤다는 게 흠이 될까 봐 신경 쓰일 뿐이었다.  


그런데 B가 내 대답을 듣고,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서 실망했다는 식으로 나오니 난처했다.


알고 보니, 그날 B의 행동은 전조증상이었다.


같이 일을 하던 중 갑자기 B가 나에게 웃으며 물었었다.

"네가 지금 한 일이 몇 점인 것 같아?"

"...?"

내가 시험을 봤나. 선생처럼 점수를 운운하는 그가 낯설었다.


"3점이야. 3점."

100점 중에 3점이야. 하하하. 그가 웃으며 덧붙였다.

아마 그도 다른 선배들에게 비슷한 대우를 받았을 것 같았다.

"B가 하는 일은 몇 점인 것 같아? 2점이야. 2점. 하하하."


주변 선배들에게 꼼짝도 못 하는 그가 나에게만큼은 소소한 순간까지도 군림하려고 애썼다.

 

그의 버둥거림은 나방의 날갯짓이었다. B는 비대한 자아를 과도하게 흔들어대며 날갯짓을 했다. 그럴 때마다 그 날개에서 가루가 떨어졌다. 쓸데없는 가루는 내가 먼지 털듯 탈탈 털어버려야 마땅한 것이었다.


B는 내가 한 일 중에 하나가 3점이라고 했지만, B의 무수한 언행은 0점이었다. 뭐, 점수를 매길 대상조차도 아니지만. 당시 B는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고자 괴상한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제삼자가 그런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지 B는 인지하지 못하는 듯했다.


B는 나와 회사 일도 하고, 점심도 먹고, 카페에서 차도 마셨다. 그러나 B는 나를 회사 사람이 아닌 본인이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해야 하는 무대처럼 여겼다. B는 무대에서 빛나고자 스스로 우스운 분장을 하고 어설프게 춤을 추고 있었다. B의 어리석음이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있는데, 갑자기 B가 나에게 다가왔다.

"E가 너한테 그 일 하라고 했잖아. 그런데 네가 만든 자료를 E가 얼마나 볼 것 같아?"


나는 B에게 일의 효용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B가 그 말을 하는 이유는 뻔했다. 누가 들어도 질문은 아니었다. B가 프로그램 제목을 물어봤을 때처럼 자문자답 형식이었다.


네가 야근까지 하며 뼈 빠지게 일해도, E는 그토록 방대한 자료를 자세하게 확인하지 않을 거라는 조소였다. 어쩌면 B는 지나치게 열심히 일하는 선배 E를 싫어했을 수도 있다. 차마 그런 감정을 E에게는 티 내지 못하고, E와 같이 일하는 나에게 분풀이를 했을 수도 있다.  


물론 B가 얄밉게만 굴었던 건 아니었다. 한 번 B가 나에게 차를 사다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다. 내가 4개의 차를 하나씩 책상에 올려둘 때마다, 그는 고맙다는 말을 무려 4번씩이나 했다. 고맙다는 의례적인 인사에서 미안해하는 B의 감정이 묻어났다.


B가 나에게 우산을 빌렸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B는 우산을 다 쓰고 내 책상 밑에 두고 갔다. 그런데 어찌나 우산을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접어두었는지. 3단 우산이 모난 곳 하나 없이 아주 깔끔하게 접혀 있었다. 남의 우산이 젖었기에 도의적으로 신경 써서 접어둔 듯했다.


사실 내가 B의 평범한 행동에 대해 후하게 치는 이유는, B에 대한 기대치가 낮기 때문이다. 고맙다고 하는 것도, 우산을 잘 접어둔 것도 B가 성향대로 행동한 것일 수 있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B는 상식적인 예의를 갖췄고, 어떤 면에서는 그런 태도가 당연했다.


그러나 B는 오만방자함과 엉뚱한 무례함을 가감 없이 드러내, 나에게 이미지가 깎인 지 오래였다. B는 쓸데없이 팽배해진 자아를 기분 내키는 대로 흔들었다. 물론 B가 모두에게 그러지는 못했다. B는 자신을 해할 것 같지 않은 사람에게만 자아를 함부로 표출했다.   


B는 평이하게 가다가도, 갑작스럽게 고삐 풀린 말처럼 말하고 행동했다. 그리고 그 또한 B의 진심이었다. 말과 행동은 속마음이 구체화된 결과이니까. 항상 마음에 담아 둔 진심을 B는 순간적으로 뱉을 뿐이었다.


나는 B의 말과 행동을 데이터로 그가 어떤 종류인지에 대한 분석이 이미 끝나 있었다. 그래서 B가 상식적인 예의라도 갖췄을 때, 그 순간만큼은 나름 나쁘지 않다고 평가했던 것이다.


내가 B를 그렇게까지 나쁘게 보지 않은 근본적인 이유가 그에 대한 낮은 기대감 때문이라니. 재밌는 결과이다.


B는 나보다 나이는 많지만, 그 팀 내에서 가장 어린 연차였다. 젊은 그는 한참 선배가 아닌 신입에 가까운 나를 대상으로 자존감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굉장히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연차상 B는 한참 사람들에게 치이는 단계에서 많은 상처를 받고 있을 터였다. 그런 B의 마음을 이해해야 할지.

사회적 인정을 이런 방식으로 받으려고 안간힘 쓸 필요 없다고 충고해야 할지. 미묘한 불쾌감을 느꼈다.


그런 비슷한 종류의 경험을 통해 다시 한번 느낀 건 이거다.


인간에게 대단한 도덕성을 기대할 필요가 없다. 그저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노골적으로 무시하지만 않으면, 좋은 사람은 아니지만 괴짜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다. 사회는 좋은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의 군집일 뿐이니까. 사회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그다지 놀랄 게 없다.


물론 내가 B에게 엄격한 도덕적인 잣대를 대지는 않았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구체적인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B의 행동은 타인에게 충분히 껄끄러운 무엇이었다.


B가 엄청 이상한 사람도 아니었고 엄청 좋은 사람도 아니었다. B는 평범했고, 살짝 이상했고, 살짝 오만했고, 가끔씩 착했고, 간간이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B는. 


B와 같이 일한 것일 뿐, 친하지 않았고 친해질 생각도 없었다. 일을 하되, 최소한 서로 피해 주지 않으려고 했다. 그게 다였다.


그런 심플한 인간관계 속에서도 꽤 복잡한 상호작용이 있었다. 다채로운 상황에 부딪힐 때마다, B는 상대의 자존심을 꺾고 자신의 자존심을 올리는데 몰두하곤 했다.


그런 행동이 B만의 생존 방식일 것이다. 남을 짓밟고 내가 올라서는 게 사회의 단면이니까. 사회의 단면을 B는 저항 없이 따라갔다. 어쩌면 B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고, 사회에서 적당한 타이밍에 자신의 허기진 내면을 드러냈을 수도 있다.


내가 B 곁을 떠났어도, B는 다른 사람에게 비슷하게 행동했을 것이다.


B의 행동은 타인의 문제가 아닌 B의 내면의 문제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상황이 그를 좌지우지하는 게 아니라, B의 내면이 빈곤해서 생긴 해프닝이었다.


B는 한 아이의 아빠로, 가족의 가장으로도 살고 있었다. B는 나를 대하는 방식으로 가족을 대하지는 않을 거다. 아마도. B의 노트북 배경화면은 잔디밭에서 단란하게 찍은 가족사진이었다.


사진 속 B가 어린 딸을 보며 인자하게 웃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B가 딸을 사랑하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흰 드레스를 입은 자그마한 딸은 정말 귀여웠다.


사진에 박제된 B만 보면, 그가 이상한 말을 하는 상황과 잘 연결되지 않는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B의 모습 또한 그의 진심일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이버불링을 좋아했던 B의 최후 - 2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