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희가 없는 민주주의 국회
이철희의 참견과 손정우의 판결
2020년 7월 7일 자 한겨레에 실린 글
'정치가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다.'를
읽고 드는 생각은 한마디로
'철이 없다'이다.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올바른 태도는
타협과 포용이라는 내용의 글이었다.
정말 무책임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옳은 명제라도
어떤 시기에, 어떤 사안을 대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다.
지금 시점은
국회 법사위를 정점으로 상임위 배정과
추가경정예산 통과가 맞물린 시기이다.
애초에 타협과 포용을 가로막고
자기 기익에만 몰두해서 나라 발전을
가로막고 국민을 고통에 빠트리는 상대방을
여전히
타협과 포용으로 대하며
결과를 이끌어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다.
복지를 가로막으면 막혀야 하고
정치를 후퇴시키면 후퇴하면서
역사가 퇴보되는 것을 지켜보는 게
타협과 포용이라 생각하는지
묻고 싶다.
이런 태도는 성착취 가해자를 판단하는
일부 판사들의 태도와 매우 닮아있다고 생각한다.
범죄의 중대성과 피해자가 겪을 고통을 인정하면서도
"젊은 가해자에게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이 남았다거나"
"전과가 없고, 우발적으로 일으킨 범죄인 점을 감안한다거나"
"피해자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어 보이므로"
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며, 풀어줘 버린다.
참 이상하게도
가해자의 입장에 더 깊은 공감을 해버린다.
실력없는 정치인의 엉뚱한 상황임식과
잘못된 결론, 멍청한 주장이 함께 생각났다.
정치를 망가뜨리는 정치 종양들 때문에
국민이 아파하고 죽어가고 있는데
종양들과도 설득하겠다는 소리처럼 읽혔다.
물론 정치꾼들을 종양으로 인식하는 게 문제라고
내게 충고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라를 망가뜨리고, 팔아먹고
그 때문에 생명줄인 강이 파헤쳐지고
나라의 곡간을 제 주머니처럼 털어먹고
판결을 조작하고, 범죄자를 놓아주고
거꾸로 없는 죄를 만들어 사람을 구속시키고
304명의 국민이 수장되는 걸 지켜만 보고
그 유가족을 모욕하고, 사찰하고
국정이 농락당하는 나라를 만드는 중심에
저들이 있었다.
난 그래서 정치 종양이라고 생각한다.
종양이 되기 전까지
오랫동안 염증반응이 있었을 것이다.
정치인이라면 염증 단계에서 타협하고
포용하며, 정치 실력을 입증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암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수술해야 한다.
그래야만 나라가 살고 국민이 산다.
예약의학이나 대체의학 치료 가능성은
너무 희박하고 불투명 하다.
이 시국에 타협과 포용을 얘기라는 것은
방조 내지 동조라고 생각된다.
실력 없는 정치가가 암을 키운다고 생각된다.
일부 잘못된 판결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피해자는 인생이 망가졌는데
이미 죽은 채로 겨우 숨을 쉬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상하게 피해자 입자에서 공감해 주지 않고
법이 정한 적절할 판결이 아니라
법이 허락한 최대한 가벼운 형을 내려버린다.
특히나 청소년 범죄는 더 가볍게 본다.
심지어 어떤 판사는
가해자에게 큰 소리로
"잘못했습니다."를 몇 번 반복한 후에
훈방 조치해버린다.
"어차피 엎질러진 물,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저 사건에서는
피해자도 청소년이라는 점이다.
청소년 학교폭력이나, 성폭력은
피해자가 살아가는 동안 평생 피해를 준다.
가해자에게 올바른 처벌이 내려진다고 해서
피해자의 피해가 회복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덜 억울하게는 해줘야 한다.
그나마 숨은 쉬게 해줘야 한다.
그래도 법이 있어 다행이다! 라며
남은 힘을 짜내 살아가게 도와줘야 했다.
이번 손정우 판결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린 십 대 청소년들은 기본이고
영. 유아의 성착취 영상까지 유통하며
공유하고, 전 세계에 퍼트리서
경제적 이익을 취한 국제범죄 가해자를
미국에 송환하지 않고 풀어줘 버렸다.
피해자에 공감하지 못하는 판결이라
생각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피해 보는 국민들에 공감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토론과 타협은, 그것이 가능한 상대와
하는 것이 상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