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에서의 여정 (4) - 르네상스 도시 피렌체 관람기 II
피렌체에서 '압도하는 느낌'을 주는 곳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시뇨리아 광장 일대의 건축물들이다.
압도하는 느낌을 주는 공통 요소는 무엇일까?
필자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크기이다.
정말 크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원본을 보면
생각보다 그림의 크기가 작아 놀라지만,
피렌체를 대표하는 두 장소를 실제로 보면
반대로 생각보다 너무 커서 놀란다.
둘째, 건축물이 만들어진 시대적 배경이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도시 국가 중 피렌체를 주인공으로 만든
르네상스 시대는 14~16세기 쯤으로 보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5~7세기 전에
큼직한 건축물을 너끈히 지었다고 생각하면 놀라움이 배가된다.
피렌체가 단순히 부유한 도시라서,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태동했으니 그 흐름에 따라서
그 도시를 대표하는 두 장소가 탄생했다고 단정짓기엔
너무 많은 역사적 맥락이 생략되는 문제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과
시뇨리아 광장 일대의 건축물들을 둘러싼 역사 이야기를 풀어보면서
피렌체의 내력을 알아보고자 한다.
유럽에는 수많은 성당이 존재한다.
성당의 규모와 건축 방식에는 차이가 있더라도
오늘날까지 살아 숨쉬는 소중한 문화유산들이다.
그런데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성당들 중에서도 '으뜸'임을 은연중에 어필한다.
그 성당을 돋보이게 하는 특징인 '큰 돔'을
다른 성당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어필의 근거이다.
그럴 만하다.
건축 기술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와 달리,
르네상스 시대에 큰 돔을 성당 위에 얹었다는 건
분명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큰 돔을 성당 위에 얹을 수 있었던
이유를 알아볼 동기는 충분하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은 '세대를 뛰어넘는' 건축물이었다.
성당의 착공은 1296년에 이루어졌고,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
1240?~1300~1310)가 설계를 맡았다.
돔을 얹어 성당을 완성시킨 천재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는 성당을 최초로 설계한 사람보다 2세기 뒤에 등장했다.
(참고: 로스 킹, 『브루넬레스키의 돔』, 김지윤 옮김, 도토리하우스, 2021, p.19)
다르게 말하면, 그 성당은 짓기 어려운 건축물이었다.
돔을 얹는 것이 큰 난제였다.
시대적 배경을 생각했을 때
돔 건축에 활용할 석재를 성당 위로 옮기는 것부터 어려운 일이었고,
무거운 석재로 이루어진 돔이
하중을 완벽하게 분산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만약 성당을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면,
공중 부벽(Flying Buttress)을 설치해
건축물의 하중을 분산하는 문제를 손쉽게 해결했을 것이다.
하지만 11화에서 얘기했듯이,
고딕 양식은 피렌체를 위협하는 적국인 밀라노의 건축 양식이자,
이탈리아에서 보편적으로 채택되지 않은 건축 양식이었다.
(참고: 위의 책, p.25)
고딕 양식에서 탈피하되,
어느 유럽 성당과도 비견될 수 없는 큰 돔이 위용을 자랑하는 것이
피렌체인이 원하는 성당의 모습이었다.
피렌체인의 염원은 현실이 받아들이기에
너무 과분한 것처럼 보였다.
그 과분한 염원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그 주역이었다.
천재의 재능은 '공인받은 학식'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경우가 많다.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재능이 그 사례이다.
본래 그의 직업은 금 세공사였다.
세밀함을 중시하는 금 세공업과
큼직한 건축물을 설계하는 작업은
분명히 분야도 다르고, 요구되는 지식과 능력도 다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융합적 사고'를 가졌던 셈이다.
그는 성당의 돔을 쌓을 때 독창적인 공법을 제시했고,
이를 위한 기계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것을 설명하기보다는 시각 자료를 한 번 보는 편이 낫다.
설명하자면 한없이 어렵고, 필자도 다 이해하지 못했다.
아래 돔 시각 자료는 참고 영상의 0:45~1:30초를 요약한 것이다.
또 짚고 넘어갈 부분은 브루넬레스키의 생애이다.
성당에 큰 돔을 성공적으로 얹어 피렌체인의 오랜 염원을 이뤄냈으니,
그의 삶도 승승장구했을 것처럼 보인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건축가에 대한 취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는 그러한 시대적 한계를 뚫고, 유명세와 부를 얻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그는 돔을 설계하고 완성하는 20여 년 동안 몇 가지 갈등에 부딪혔다.
돔 설계 작업은 브루넬레스키 혼자 한 게 아니었다.
그의 경쟁자였던 로렌초 기베르티(Lorenzo Ghiberti, 1378~1455)와
기베르티를 후원하는 단테 문학을 가르치던 교수
조반니 디 게라르도 다 프라토(Giovanni di Gherardo da Prato,
1360/1367~1446)도 돔 설계 작업에 참여했다.
신경전이 펼쳐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혁신적인' 그의 발명품이 인정받지 못할 때도 있었다.
일 바달로네(il Badalone)는
성당 건설에 필요한 대리석 운반 비용을 절감하고자
그가 야심차게 발명한 배이다.
하지만 그 배는 대리석 운반 과정에서 좌초됐고,
발명에 투자한 돈도 날아갔다.
(참고: 위의 책, pp.214-231)
밀라노와 피렌체 간의 알력 다툼도 그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1424년, 피렌체는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Filippo Maria Visconti,
1392~1447,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의 아들)가 이끄는
밀라노 공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때 그는 댐을 만들어 밀라노군을 수장시키는 군사 작전을 펼쳤으나,
도리어 피렌체군을 수장시키는 참사를 초래했다.
전쟁은 피렌체의 참패로 끝났다.
그는 사람들에게 비난을 받고 감옥에 잠깐 갇히는 수모도 겪었다.
(참고: 위의 책, pp.238-249, 255-259)
표절은 창작을 업으로 삼는 사람에게 용인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를 빼앗길까봐 조수를 두지 않았다.
다만, 예외적으로 돔 위에 올릴 첨탑을 설계할 때는
안토니오 디 치아케리 마네티(Antonio di Ciaccheri Manetti,
1423~1497)를 조수로 두었다.
그런데 그 조수가 자신의 아이디어를 도용했다.
결국 그가 죽은 지 6년 뒤인 1452년,
마네티는 브루넬레스키의 아이디어를 배운 덕분에
첨탑을 설계하는 책임자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참고: 위의 책, pp.277-278)
그밖에도 브루넬레스키의 생애에 관한 정말 많은 이야기가 있다.
필자는 그중에서 핵심적인 내용만 소개했다.
이후의 글에서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이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감상해보자.
독자 여러분은 그 성당과 관련한 역사 이야기를 알게 되었으니
'아는 만큼 보일 것'이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관람을 마치고
시뇨리아 광장으로 이동했다.
시뇨리아(Signoria)는
한 명의 인물 또는 하나의 가문이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 체제 또는
통치 기구를 의미하는 이탈리아어이다.
(참고: 김종법, 임동현, 『이탈리아역사 다이제스트 100』, 가람기획, 2024, p.116 ;
로스 킹, 위의 책, p.41 ;
박윤덕 외, 『서양사강좌』(개정증보판), 아카넷, 2022, p.271)
비스콘티 가문이 밀라노를 통치하는 것,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통치하는 것 모두 시뇨리아에 해당한다.
시뇨리아는 곧 정치의 민주성이 어느 정도 있었던
코뮌의 종말이기도 하다.
정치 권력이 하나로 집중된 영향 탓일까?
시뇨리아 광장 일대의 건축물은
메디치 가문의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듯 으리으리하고 크다.
그 권력은 비단 피렌체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교황이 배출되기도 했고,
프랑스로 시집을 가 왕비가 된 메디치 가문의 여자도 존재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메디치 가문의 가계도를 확인해보길 바란다.
부자는 은연중에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받는다.
돈만 많고 품행이 바르지 못하다면, '천박하다'는 비난을 받기 때문이다.
메디치 가문을 번성케 한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Giovanni di Bicci de' Medici, 1360~1429),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는
피렌체의 문예 부흥을 불러일으킨 '품위 있는 거물'이었다.
메디치 가문을 부유하게 만든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는
산 로렌초 성당(Basilica di San Lorenzo)의 재건축을 후원했다.
피렌체의 실권을 장악한 코시모 데 메디치는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를 후원하고,
고대 그리스 문화에 관심이 많아 플라톤 아카데미아(Accademia
Platonica)를 설립했으며,
비잔티움 제국의 각종 고문서를 수집했다.
로렌초 데 메디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여러 예술가를 전폭적으로 후원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절정에 이르게 한 장본인이다.
(참고: 김종법, 임동현, 위의 책, pp.129-130 ;
로스 킹, 위의 책, p.258 ; 박윤덕 외, 위의 책, p.207)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
메디치 가문의 권력이 집약된 곳이 바로 시뇨리아 광장이다.
이 가문이 없었다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주도권은
다른 도시에게로 넘어갔을지 모른다.
시뇨리아 광장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그림을 하나 소개한다.
필리포 돌치아티(Filippo Dolciati, 1443~1519)가
1498년에 그린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화형(Hanging and
Burning of Girolamo Savonarola in Florence)>에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시뇨리아 광장,
베키오궁, 로지아 델라 시뇨리아가 묘사되어 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페라라 출신의 도미니코회 수도사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메디치 가문의 부패를 설교하여
피렌체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추방된 이후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종교의 엄격함을 강조한 그의 통치는 시민들의 반감을 샀다.
이후 교황 알렉산데르 6세(Pope Alexander VI/
Papa Alessandro VI, 1431~1503)가
그를 이단으로 간주하면서 종교적인 정통성마저 잃어버렸고,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당했다.
(참고: 김종법, 임동현, 위의 책, pp.137-138)
그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묘사한 그림은
15세기 말 피렌체의 모습을 보여주는
역사적 가치가 높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뇨리아 광장을 언급하는 김에 소개해봤다.
여기까지 글을 읽었다면,
피렌체에서의 일정을 두 편의 글로 나눈 이유를 알았을 것이다.
피렌체의 역사와 문화는 정말 굵직하고,
알수록 새로운 사실들이 많다.
피렌체를 잘 알아가는 계기가 되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