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세부 내용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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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내용 소개
표류기도 어떻게 보면 여행기입니다. 하멜이 이 소리를 들으면 '나는 13년 동안 타지에서 개고생을 했는데, 겨우 여행으로 치부한다고?'라며 발끈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표류기와 여행기 모두 '일상에서 벗어난 상태에 있을 때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다는 점에선 성격이 같습니다. 하멜이 조선에 표류하면서 보고 들은 것도, 그의 입장에선 '신기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책의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서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실 하멜은 조선 땅을 최초로 밟은 네덜란드인이 아닙니다. 그에 앞서, 벨테브레이(Jan Janse Weltevree, 1595~ 1656, 귀화명은 박연[朴淵].)라는 네덜란드인 역시 1627년에 제주도에 표착한 뒤, 죽을 때까지 조선에서 살았습니다. 하멜은 표류한 지 2달 후, 벨테브레이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멜은 같은 네덜란드인을 만나 반가워했는데, 벨테브레이가 '국왕에게 가도 돌아갈 방법은 마땅히 없다'는 말을 들으며 낙담했습니다(책의 p.37). 만약 그랬다면, 벨테브레이도 진작에 돌아갔겠죠.
타국의 언어와 생활에 익숙해지면, 도리어 모국의 언어와 생활을 잊어버리기 마련입니다. 하멜과의 만남을 가졌을 시점의 벨테브레이는, 조선에서 무려 26년의 시간을 보낸 상태였습니다. 조선 총독(수령)이 벨테브레이를 소개할 때 '조선 사람'이라고 밝힌 점, 벨테브레이가 하멜과 '서투른 네덜란드어'로 대화했다는 점이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책의 pp 35-36). 하멜도 '조선화된 벨테브레이'를 아래와 같이 서술했습니다. 한 달간 같이 생활하니 모국어를 알아듣고 구사하는 능력을 회복했다는 서술에서, 출신, 민족 같이 한 사람을 '국가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강하게 규정하는 정체성은 잊혀지다가도 금방 회복이 되는 것 같습니다.
그(벨테브레이)는 약 57,8세 정도 되어 보였는데, 놀랍게도 모국어를 거의 다 잊어버리고 있어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처음에는 저희들의 말을 거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만, 저희들과 약 한 달 동안 같이 있다 보니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 헨드릭 하멜,『하멜 표류기』, 신동운 옮김, 스타북스, 2020, p.37.
사람을 잘 만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나 중요합니다. 하멜처럼, 낯선 곳에서 표류하게 되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겠죠. 표류기에서는 하멜 일행을 따뜻하고 후하게 대접한 조선 총독에 대한 고마움, 그렇지 않은 조선 총독 밑에서 겪은 고생을 대비해 서술하면서,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중요하다'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몇 번의 탈출 시도도 하멜 일행이 고생을 겪었을 때 행해졌다는 사실은, 마치 상사나 직장 동료의 등쌀에 시달릴 때 '퇴사하고 싶다'는 현대 직장인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내가 속한 집단이 준거집단이 되려면, 집단 구성원으로부터 인정과 대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벨테브레이가 조선에서 생을 마감한 이유, 하멜 일행이 기어이 조선을 탈출한 이유의 차이를 만듭니다. 조선은 16세기 말~17세기 중반까지 전장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조선은 16세기 말에 일본의 침략(임진왜란), 17세기 초중반에 만주에서 흥기한 후금(청)의 침략(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겪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때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의 위력을 확인하고, 서양 무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군사 지식을 가진 서양인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표착했습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그를 중앙 군영(中央軍營)인 훈련도감에 소속시켰고, 병자호란에 참전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벨테브레이는 단순한 표류민이 아니라 조선의 엄연한 구성원이 된 셈입니다. 조선 총독이 그를 '조선 사람이다.'라고 소개한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반면, 하멜 일행은 '조선을 빨리 떠나야 할 곳'으로 인식했습니다. 그들도 만약 조선 정부로부터 인정받고 후한 대우를 받았다면, 벨테브레이와 같은 전철을 밟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외국인의 해외 송환을 불허하는 국왕의 결정, 조선 총독이 어떤 사람이느냐에 따라 바뀌는 처우라는 두 가지 요인이 '조선을 하루빨리 떠나야겠다'라는 생각을 확고히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하멜이 조선 탈출에 성공한 해인 1666년에도 여전히 상급자에 의해 고생에 시달렸습니다. 게다가 탄약 폭발 사건이 일어나 암행어사가 출두하고, 상급자가 빈번히 교체됐습니다(책의 pp 106-107). 그는 이런 상황에서 '노예와 같은 처우'는 개선되지 않을 거라는 '불길한 직감'을 느껴 탈출에 반드시 성공해야 된다고 다짐한 듯 합니다. 탈출에 성공한 뒤, 그가 나가사키 부교와 면담할 때도 '조선이 얼마나 싫었는지'를 아래 기록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Q: 국왕은 너희들을 석방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이 탈주했는가.
A: 우리들은 국왕이 우리들을 석방하지 않을 것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치를 보고 8명이 탈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 이유는 외국 땅에서 불안하게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위의 책, p.134.
20세기 들어,『하멜 표류기』는 한국으로 역수입됩니다. 1913년, 이승만의 주도로 『태평양잡지』가 창간되고, 거기에 '하멜의 일기'를 6개월간(1913년 11월~1914년 5월) 연재된 것이 『하멜 표류기』가 최초로 한국어본으로 번역된 과정이었습니다. 이후 실증사학으로 대표되는 역사학자 이병도(1886~1989)가 진단학회를 창립하고, 『난선 제주도 난파기』로 다시 번역했습니다. 『태평양잡지』에서의 『하멜 표류기』번역은 어느 판본을 기준으로 번역했는지 명확하지 않은데, 이병도의 번역은 영역본과 불역본(프랑스어 번역본)을 대조하며 번역해 내용의 정확성을 높였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있습니다(김경남, 『하멜표류기』의 번역 양상과 ‘표류 체험’의 서사⋅이문화 교섭의 의미, 『탐라문화』, Vol.0 No.68, 제주대학교 탐라문화연구원, 2021, pp. 81, 84-85).
분명한 건 한국인의 입장에서도『하멜 표류기』는 흥미로운 기록이라는 점입니다. 『태평양잡지』의 번역본에서도 『하멜 표류기』의 흥미로움에 대해 밝히고 있으며, 책의 '조선국에 관한 기술'에서 밝힌 조선의 문화 중 일부는 오늘날에도 들어맞는 구석이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교육열, 훈민정음의 우수성에 대한 서술을 대표적으로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
(1)
헨으리(헨드릭) 하멜이라 하는 이는 하란국(네덜란드) 사람으로 한국에서 잡혀서 13년을 갇혔다가 요행히 살아서 도망하여 본국으로 돌아간 사람인데, 그가 갇혔을 적에 일기로 적어둔 글이 있어서 전후 경력을 기록하였는데, 그 글이 지금 드러난지라. 그 글엔 우스운 구절도 있고, 가긍한(가여운) 사연도 있으니 우리가 다 이 글을 재밌게 읽고 그 정경을 한 번 생각해 볼만하다.
* 원문은 근대 국어이나, 필자가 적절히 뜻에 맞게 현대 국어로 의역했습니다.
- 위의 논문, p.81.
(2)
아이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합니다. 이런 어린아이들이 자기가 배운 책을 훌륭하게 해설하는 것을 보면 정말 놀랄 만합니다.
- 위의 책, p.161. <교육에 대하여> 中
(3)
문자를 쓰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는 중국이나 일본의 글자(한자)와 같습니다. 둘째는 굉장히 빨리 쓰는 글씨(흘려쓴 한자)로서 네덜란드의 필기체와 비슷합니다. 셋째는 가장 낮은 수준의 문자(훈민정음)로 여자나 일반 백성이 사용합니다. 이것은 배우기 쉬울 뿐 아니라, 모든 사물을 아주 쉽게 또 그 음을 아주 정확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 위의 책, p.172. <언어⋅문자⋅계산법에 대하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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