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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공포증: 엘리트와 공화주의 시선에서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세부 내용 소개 I

by 샤를마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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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내용 소개

민주주의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민주주의의 정의대로라면, 국민이 국가 권력의 주인이고, 이를 행사해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국민은 명목상의 대표이고,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따로 있습니다. 대통령, 국회의원 등이 그 예시이죠. 지금의 민주주의는 국민이 갖는 국가 권력을 대표자에게 위임해 행사하는 대의민주주의입니다. 그러므로 국민이 국가 권력의 주인인 민주주의의 본래 정의는 변하지 않지만, 실질에서 주인 대신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대의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정치 뉴스를 보면 '저렇게 정치를 하는 게 맞을까?' 라는 의문이 드는 순간이 많기 마련입니다. 정치인의 세계는 일반인의 세계와 분리되어 '특권층'이라는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대의민주주의에 직접민주주의의 요소를 더 추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숙고해야 할 의견일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민주주의가 적합한지 문제삼기도 합니다. 이 문제의식은 '암묵적 계급주의'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이 고학력이고, 집안도 좋고 재산이 많아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주변 인맥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로 형성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데 그와 정반대인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하겠습니까? 사람의 배경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해, 열린 잣대로 대한다면 '인격까지 높은 사람'일 겁니다. 보통은 겉으로 싫은 티는 안 내지만, 가까이 두지 않으려 할 겁니다. '나는 저 사람과 어울리기에 안 맞다'라고, 내적으로 계급을 형성하는 행위이죠. 여기서 '엘리트층의 세계관'이 형성됩니다.

엘리트층의 세계관에서 민주주의를 들여다봅시다. 민주주의는 출신이나 배경 상관없이 '국민'이라면 향유하는 이념입니다. 오늘날 대의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국민의 의사를 직접 행사하는 건 선거입니다. 누구든 선거에서 똑같이 1표를 행사합니다. 다만, 지역, 세대, 재산 등 다양한 배경에 따라 어느 정당, 인물을 지지하는지 확연히 달라집니다. 선거에서 승리하면 그것이 곧 국가 권력의 행사 방향을 좌우하는 만큼, 선거 패배 세력을 지지한 사람들의 실망도 큰 법입니다. 선거 승리 세력이 엘리트층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의지가 결집되어 형성된 상황이라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엘리트층은 그 선거를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암묵적 계급주의의 시선으로 보면, '우리처럼 지체 높은 사람이 아니라, 그저 그런 사람들의 야합으로 국가 권력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은 곧 민주주의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근대까지 민주주의는 엘리트층의 세계관에서 해석됐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를 혐오의 대상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주의를 '가난한 자유민이 최고 권력을 잡아, 부자의 재산을 몰수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위험한 정치 체제'로 인식(책의 pp.35, 38)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근거가 된 사회 계약론을 주창한 루소 역시도 '민주주의는 현실에서 실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회 계약론 = 민주주의가 아닌 것입니다. 결국 역사적으로 민주주의를 혐오한 것은, 그것이 엘리트층의 세계관에서 해석되었기 때문입니다. 엘리트층의 세계관에서는 민중의 의지와 목소리가 정치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책의 p.242).

<루소의 민주주의(민주정)에 대한 인식>

진정한 민주정이란 존재해본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수가 통치하고 소수가 통치받는 것은 자연적 질서에 반한다. 인민이 끊임없이 모여서 공적 사안에 열중하는 것을 상상하긴 힘들다.

신들로 구성된 인민이 있다면, 이 인민은 민주정으로 스스로를 통치할 것이다. 그렇게 완전한 정부는 인간에게는 맞지 않는다.

모든 것을 잘 검토한 결과, 나는 아주 작은 도시국가가 아니라면 우리가 주권자로서 자신의 권리를 지속적으로 행사하는 것이 이제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 김민철,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창비, 2023, pp.101-102, 105.

공화주의도 엘리트층 세계관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이념이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봤을 때, 공화주의는 전제주의보다는 '민주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전제주의는 오로지 한 명의 군주만 국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공화주의는 한 명이 아닌 불특정다수의 사람이 국가 운영에 책임을 지는 것이니까요. 공화주의는 그래도 국가 운영을 위한 권력을 얻는 길이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사실상 내정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동네 바보를 갑자기 국가를 이끄는 자리에 앉히면 찬성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기존 전제주의의 권력을 대신할 만큼 뛰어난 사람이 공화주의 체제에서의 적임자이겠죠? 로마와 중세 이탈리아 도시에서 나타난 공화정도 기본적으로 가진 것과 능력이 있어야 정치에 참여하기 유리한 구조였습니다. 결국 공화주의도 민주주의와 거리가 멉니다.

흔히들 유럽에서 중세가 지나가고 르네상스라는 근대의 태동기가 시작되자 이탈리아와 독일 지역의 여러 자치도시국가에서 민주주의의 전통이 싹텄다고 말한다. 널리 받아들여진 교과서 방식의 설명이다. 그러나 이 설명에는 문제가 있다.

어떤 도시나 국가가 자치를 한다는 것과 그 자치를 인민 전체가 평등하게 직접 실행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도시들이 싹틔운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주의였다. 600년 전 이탈리아 공화국들의 정치사상과 현실에 관해 널리 퍼진 오해는 대체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혼동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요컨대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은 민주적인 공화국을 뜻한다. 즉 과거에 이 단어가 만들어지던 시점에서는 공화국이 민주적이지 않은 것이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이거나, 적어도 민주적이지 않은 공화국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여겨졌음이 틀림없다.

- 위의 책, pp.51-52.

공화주의는 전근대적 관념 또한 내포합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은 국가의 흥망성쇠를 포르투나(Fort una)라는 행운의 여신에 의해 결정된다고 봤습니다. 포르투나가 행운과 불운을 결정하는 관건은 덕성(Vir tue)이었습니다. 지금도 훌륭한 지도자가 갖춰야 할 요건 중 하나가 덕이지만, 그 시대에는 덕을 사상적으로 더욱 중요하게 해석했습니다. 그 해석을 요약하면 덕성은 남성이 많을수록, 인간 집단의 수준이 좋을수록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국가에 여성이 많고 '낮은 수준의 인간 집단'으로 여겨지는 민중의 힘이 세면 그 국가의 운명은 불행해진다는 뜻입니다. 덕성이라는 관념으로 여성의 정치 진출과 민주주의를 자연스럽게 배제한 셈입니다(책의 pp.57-61). 공화주의가 민주주의와 더욱 결이 같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이 글에서 민주주의를 보는 관점을 몇 가지 획득했을 겁니다. 첫째, 민주주의는 오늘날에 만들어진 '정치 내지 기술적' 용어가 아니라 오래전부터 사용되던 '역사적' 용어입니다(책의 p.13). 여기서 역사와 언어의 관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언어가 오랜 시간 존재해왔다면, 각 시간의 국면에 따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의미와 용례가 달라지기도 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용어도 그 예시에 해당합니다. 둘째, 민중이 아닌 똑똑한 소수가 국가 운영을 위한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보는 엘리트층의 세계관이 공고하면 민주주의는 자리잡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근대까지 민주주의는 엘리트층의 세계관에서 부정적 의미로 해석되고, 그것이 깨지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 변화는 시대적 격변이 수반되어야 가능했던 것입니다. 셋째,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념입니다. 공화주의는 국가 운영을 공동으로 책임진다는 측면에선 민주주의와 같아보이지만, 공화주의에서는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가 가져야 할 조건을 까다롭게 달고 '민중의 정치 참여'를 제한하는 걸 보편적으로 여겼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전면적으로 변화되고 수용됐을까요? 그것을 한 장의 글을 더 할애해 자세히 짚어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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