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신예찬』세부 내용 소개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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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내용 소개
보통 '어리석음'은 부정적 의미의 단어로 취급됩니다. 어리석음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무지함, 깨우치지 않아 우둔함일 것입니다. 좋은 의미의 단어가 아니죠. 이성이 있고 똑똑한 사람일수록 그 말을 듣기 싫어합니다.
만약 어리석음을 '예찬'한다면 어떻게 받아들이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자아낼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음의 의미를 긍정적으로 해석한 사례가 있습니다. 『우신예찬』이 그것입니다. 풀어서 해석하면 어리석은 신(어리석음을 관장하는 신)을 예찬한다는 뜻입니다.
인생은 괴로움의 연속입니다. 살면서 즐거운 일만 있진 않습니다. 제일 쉬운 예시로 '1주'라는 시간을 생각해봅시다. 1주 중 5일의 평일은 학교를 가거나 일을 해야 됩니다. 자유로운 상태가 아니니 괴롭겠죠. 괴로운 평일을 버티면 2일의 즐거운 주말이 찾아옵니다. 주말에는 쉬거나 여가 활동을 하며 평일의 괴로움을 잊고, 다음 주의 평일을 보낼 준비를 합니다. 그렇게 일상을 살아갑니다. 만약 1주가 모두 평일이라면, 정말 괴로워서 살기 싫겠죠? '잠깐의 즐거움'이라는 휴식처가 곳곳에 있어야 괴로운 인생을 그래도 삽니다.
현대는 생산성이 중요해지면서, '노는 것'을 은근히 죄악으로 취급합니다. 놀 시간에 공부 또는 일을 더 하라는 핀잔을 심심치 않게 듣는 세상입니다. 생산성을 중시하는 현대의 관점에서 노는 것은 곧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시간을 잘 운용해서 성과를 내놓아야 하는데, 놀면 그렇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일만 하며 살 수 없습니다. 일을 잘하려면, 잘 쉬기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일을 지속하기 위한 재충전의 관점에서 노는 것은 현명한 행위입니다. 이렇게 관점을 달리하면, 어리석음은 현명함이 됩니다. 에라스무스가 어리석음을 예찬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도대체 인간들은 어떤 업보를 쌓았기에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이며, 신들 가운데 누가 분노하였기에 인간들을 이런 고난을 겪어야 하는 것입니까? …(중략)… 하지만 나 우신은 부분적으로 무지와 더불어, 또는 아둔함을 통해, 경우에 따라서는 고통의 망각에 힘입어, 때로 행복의 희망을 빌미로, 그러니까 온갖 쾌락들로 꿀을 발라가며 이런 엄청난 고난 가운데 인생이 목숨을 스스로 끊지 않고 살아가도록 돕고 있습니다.
-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11, pp.76-77.
어리석음을 예찬하면, 반대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려는 행위가 '어리석게' 됩니다. 『우신예찬』에서는 지혜를 추구하는 철학자, 학식을 추구하는 학자가 도리어 어리석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이유는 지적 허영심을 위해 인생의 괴로움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머리를 쓰는 것은 괴로운 일이라 쉬어주기도 해야 되는데, 그들은 그걸 멈추지 않는다는 겁니다.
지혜와 학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떠올려봅시다. 쾌락을 멀리하고,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보고, 매사에 진지한 그런 이미지가 생각날 것입니다. 그들 입장에서는 지혜와 학식을 추구하는 것이 행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의 관점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좇고자 매일 머리로 고뇌하는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혜와 학식은 쓰일 때 의미가 커집니다. 에라스무스가 철학자, 학자를 비판하면서 남긴 메시지는 '무엇을 위해 지혜와 학식을 추구하는가?'이기도 합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이 '행복 추구'라면, 그것을 위해 고뇌하며 사는 건 납득할 만합니다. 반대로, '지적 허영심의 충족', '선민의식의 정당화'가 목적이라면, 차라리 어리석음이 주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게 낫습니다. 후자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지혜와 학식은 오히려 스스로를 가두는 어리석음이 됩니다. 인간 사회는 혼자 고립된 상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지혜를 찾아 골몰하는 자들은 인간들 가운데 행복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실로 두 배나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선 인간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며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조건을 망각하고 불멸의 신들이 누리는 삶을 추구하며 신들에게 덤볐던 거인족처럼 학문의 힘으로 만든 기계로써 자연에 덤벼들어 전쟁을 벌이기 때문입니다.
흔히 멍청이, 바보, 얼간이, 천치 등 내 보기에는 무척 아름다운 호칭들로 이름 불리는 이들은 무엇보다 행복한 존재들입니다.
- 위의 책, pp.85-86.
『우신예찬』은 교회의 타락상을 풍자하는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인간은 행복 추구를 위해 살아가야 한다.'라는 시간의 때를 타지 않는 지침을 담은 고전이기도 합니다. 필자도 책을 읽으며 '그 어떤 재미도 추구하지 않고 책으로만 파고드는 삶'을 신랄하게 비판한 구절들을 보고 뜨끔했습니다. 솔직히 필자의 인생도 철학자, 학자의 삶과 비슷한 구석이 많습니다. 어느 누구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지만, 내용을 읽고 보면 '나 자신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고, 좀 기분이 나쁠 것도 같지만 수긍은 되는 게 에라스무스 특유의 풍자 기법 같습니다. 그는 쾌락을 은근히 죄악시하는 현대 사회에도 이 책으로 일침을 던지고 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행복하게 살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