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3분 서양사

에라스무스, 왜 루터의 그늘에 가려졌는가?

『우신예찬』세부 내용 소개 II

by 샤를마뉴

이전 글 확인하기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81

https://brunch.co.kr/@charlemagnekim/82


세부 내용 소개

『우신예찬』의 백미는 교회 풍자입니다. 지난 장(세부 내용 소개 I)에서는 책의 전반부를 살펴봤습니다. 책 전반부에서는 어리석음의 좋은 면을 예찬하고, 그것을 활용하지 못하는 '진지한 사람들(철학자, 학자)'을 비판했습니다. 이것은 밑밥 깔기였습니다. 책 후반부부터는 교회 풍자를 서슴지 않게 행합니다. 에라스무스가 책에서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가 풍자한 교회의 타락상은 교회에 주어진 권력을 당연하게 여기고, 세속적인 가치(돈)에 골몰하는 태도로 요약됩니다. 여러 사례가 언급되는데, 아래 인용문이면 그것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교회 학자들처럼 내가 베푼 은덕에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또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간과할 수 없는 항목에 있어 내(우신)게 크게 빚지고 있는바, 우선 자아도취가 그것입니다. 이 덕분에 이들은 마치 자신들이 천국에 살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다른 중생들을 흙바닥을 기는 짐승처럼 대단하게도 불쌍히 여깁니다.

궁정 귀족들의 모습에 열심으로 도전하는 혹은 거의 능가하는 자들로 교황들과 추기경들과 주교들이 있습니다. …(중략)… 돈을 긁어모으는 일에 관하여 그들은 주교직을 아주 정확히 수행하는바, 눈먼 파수를 보지 않습니다.
* 주교(epi-scopus)는 '주변을 살핀다'는 뜻도 갖고 있음. 일종의 언어유희, 돈을 긁어모으는 주교는 주변을 살피는 주교의 역할을 행한다는 것.

- 에라스무스, 『우신예찬』, 김남우 옮김, 열린책들, 2011, pp.132-133, 158-159.

『우신예찬』이 출판된 후, 에라스무스는 그야말로 교회의 뭇매를 맞습니다. 이 책 끝부분에는 부록으로 그가 여러 교회 관계자에게 보낸 편지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그는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책을 출판한 것을 후회하지만, '그래도 잘못한 것은 없다.'가 편지들에서 일관되게 드러나는 그의 입장입니다. 지금도 온라인 플랫폼에서 댓글 한 번 잘못 달면 수많은 사람에게 각종 욕을 얻어먹습니다. 『우신예찬』을 출간한 후 그의 상황이 그랬습니다. 하지만 교회가 타락한 것은 사실이었고, 그는 책 어디에서도 어느 누구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난하는 '저격'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떳떳할 수 있었습니다. 책은 잘못이 없다는 걸 편지에서 여러 차례 강조하는데, 그만큼 교회의 지속적인 뭇매를 맞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던 그의 심정을 보여줍니다.

(1) 『우신예찬』을 출판한 것에 대한 후회
p.200 - 먼저 아주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우신예찬』을 출판한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p.235 - 이 고약한 물건이 시간과 함께 사그라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p.250 - 그 책에서 다룬 주제는 그저 가벼운 농담이었으며, 그렇게까지 심각한 평가를 들으리라고는 전혀 예측하지 못했습니다.
p.255 - 만약 내가 진작 이렇게 심한 공격을 받을 줄 알았다면, 아예 그 책을 세상에 내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하지만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한 조용히 지내고 싶어하는 성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2) 『우신예찬』은 저격성 글이 아니라는 반론
pp.202-204 - 이제껏 출판한 책들 모두에서 많은 사람들을 진지하게 언급하였던바, 내가 뉘 좋은 명성을 훼손한 적이 있습니까? 어떤 민족을, 어떤 계급을, 어떤 개인을 내가 실명을 들어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까? …(중략)… 나는 내 글로 누군가 상처 입고 피를 본 일이 없으리라 확신합니다. 또한 잘못을 범한 자일지라도 실명을 언급하여 창피를 준 일이 없다고 믿습니다. 나의 목적은 가르침으로 인도하려는 것이었지 비방이 아니었습니다.
p.209 - 나 자신을 제외한 누구의 실명도 거론하지 않는 그런 곳에 도대체 어떤 신랄한 풍자가 있었다는 것입니까?
p.224 - 못된 자들마저 마음 다치지 않도록 실명은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p.252 - 말씀드리자면 그 책의 주제는 웃음이었습니다. 저는 누구도 기분 나쁘게 공격하지 않았으며, 그 책에서 제 이름 말고 누구의 실명도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2007_CKS_07399_0192_000(021233).jpg?mode=max 교황 레오 10세(Leo X, 1475~1521) 재위 시기에 발행된 면벌부(Letter of Indulgence)
1200px-Basilica_di_San_Pietro_in_Vaticano_September_2015-1a.jpg 이탈리아 바티칸에 위치한 성 베드로 성당, 교황 레오 10세는 이 건축물을 짓기 위해 면벌부를 발행하였다.

『우신예찬』은 저자인 에라스무스가 살아있는 동안, 여러 차례 출판됐습니다(자세한 내용은 책의 pp.264-265 참고). 이 책이 한창 출판되던 시기 종교사의 흐름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 사건이 바로 잘 알려진 루터의 종교 개혁입니다.

당시 재위한 교황인 레오 10세는 전임 교황인 율리우스(율리오) 2세(lulius II, 1443~1513) 때부터 추진된 성 베드로 성당 건설 사업을 계승했습니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율리우스 2세와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이 '아주 화려한' 외양을 갖추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므로 건축 비용도 대단히 많이 들었고, 그것을 마련하기 위해서 독일 지역에 면벌부를 판매했습니다. 이 시기 독일에는 신성 로마 제국이 들어서 있었고, 종교 제후들이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교황청에 돈만 많이 바치면 독일 교회의 고위직을 얻을 수도 있었습니다. 레오 10세는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화가 어느 정도 진전된 영국, 프랑스와 달리 독일에서 건축 기금을 마련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습니다(박윤덕 외, 『서양사강좌』(개정증보판), 아카넷, 2022, pp. 277-278 참고). 그렇게 독일 내에서 면벌부 판매가 성행하였습니다. 1517년, 루터는 이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며 종교 개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을 '관조'했습니다.『우신예찬』에서 교회의 타락상을 풍자한 것처럼, 그도 교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개혁되기를 원했던 사람입니다. 루터와 에라스무스 모두 교회의 타락상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진 건 공통됩니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천 방법은 각각 달랐습니다. 에라스무스는 종교 개혁같은 급진적인 움직임보다는 교회 내부의 자정 작용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가 얀 빌 신부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 중에 '오늘날 스스로 종교인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그 이름에 걸맞은 행동을 보여줄 것을 기대'한다는 언급이 있습니다(책의 p.255). 이는 종교인들의 품행만 조심하면 웬만한 문제점은 해결된다는 의미로 비춰집니다. 따라서 종교 개혁은 그의 입장에서 볼 때 '과도한 처사'였던 셈입니다.

Lutherbibel.jpg 루터가 독일어로 번역한 성경(Lutherbibel)

반면, 루터의 종교 개혁은 기존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는 노선으로 흘러갔습니다. 제일 대표적인 사례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있습니다. 에라스무스도 기존 라틴어 불가타 성경의 권위를 거부하고, 성경을 다시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에라스무스의 성경 번역은 '정확한 원전 이해'에 더 초점을 두었습니다. 성경의 원어인 그리스어와 라틴어에 대한 지식을 갖고 성경 원전의 내용에 정확히 접근하는 것을 중시했지, 성경을 유럽 각국어로 번역하는 걸 주요 목표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루터의 성경 번역은 그것을 해석할 권리를 다수의 민중에게로 넓히는 것에 초점을 두었습니다. 에라스무스가 성경을 번역할 때 주요 목표로 삼지 않았던 '유럽 각국어로의 성경 번역'을, 루터는 주요 목표로 삼았습니다. 일반 사람이 성경을 해석할 줄 알게 되면 굳이 교회를 가지 않아도 되고, 성경을 해설하는 사제의 역할도 필요 없어집니다. 그 점에서 기존 기독교의 틀을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루터와 에라스무스는 서로 생각이 완전히 엇갈리는 관계였습니다. 성경의 성격,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 인간 본성에 대한 인식, 기독교의 역할 모두에서 두 인물의 생각은 상충되었습니다. '후배' 루터는 '선배' 에라스무스의 주장들을 하나하나 반박했습니다. 에라스무스의 『자유 의지에 관하여』, 루터가 그것에 반론하는 『노예 의지에 관하여』 , 에라스무스가 이에 다시 반론하는 『방어들』에서 대립 양상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교회는 문제가 많다'라는 공감대로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교류했던 두 인물은 이러한 논쟁이 있고 난 후 소원해집니다(김요섭, 「개선과 개혁: 루터와 에라스무스의 종교 개혁 이해 비교」, 『개혁논총』, Vol. 42, 개혁신학회, 2017).

루터의 종교 개혁이 성공하면서 에라스무스는 그의 그늘에 가려졌습니다. 루터는 서양사를 얘기할 때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인물이자, 누구나 이름은 아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반면, 에라스무스는 한평생 이름도 모르다가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잊혀진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에라스무스가 기독교의 권위에 '먼저' 도전한 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에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풍자하는 책을 쓰고, 성경을 다시 번역하는 행위는 당시에 보통 용기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루터는 에라스무스의 선례를 바탕으로 종교 개혁이라는 더 과감한 도전을 할 수 있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그늘로 치부하는 게 아닌, 루터의 후광으로 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까지『우신예찬』내용을 소개하면서 에라스무스는 누구인지, 그와 관련된 역사적 배경까지 다뤘습니다. 시대적 범주로 '서양 근세사', 테마로 '르네상스, 인문주의, 종교개혁'에 은근한 흥미를 느낀 독자가 있었기를 바랍니다. 지식을 퍼즐처럼 끼워맞추는 재미를 주는 지점이 서양 근세사와 그 테마에서 유독 많은 것 같습니다. 필자도 본래 그 분야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에라스무스로 인물 탐구 보고서를 쓰면서 흥미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흥미를 공유하고자 여기에 다시 글을 남겼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똑똑하면 오히려 어리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