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5남매의 첫째셨다. 나의 증조할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삼촌, 고모들... 이렇게 8명이 먹고살려면 많은 돈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배를 타기 시작했다. 해운회사에 입사하셔서 수출선의 기관 파트에서 일하셨다. 세탁소를 운영하시던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일을 시작한 후 일을 그만두셨다. 8명이 아버지의 월급만 바라보고 살았다고 한다. 나이 차이 많이 나는 동생들 학교도 보내야 하고 가족들 식비에 용돈에 10년 동안 돈 한 푼 모으지 못하고 월급을 모두 썼다. 설상가상으로 수출선에서 일하시다가 새끼손가락을 잘리는 사고도 겪으셨다.
동생들 졸업 후 아버지는 수출선 일을 그만두시고 장사를 시작하셨다. 가장 먼저 하신 장사는 빵집이었다. 만두와 도넛을 파는 가게였는데 그곳에 딸린 작은 쪽방에서 부모님과 나와 동생이 함께 살았다. 그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초등학생이 되던 해 아버지는 만화방을 시작하셨다. 지금의 내 나이가 벌써 그 당시 아버지 나이보다 많으니 참 세월이 빠른 것 같다. 아버지는 만화방을 하시며 쉬지 않고 일하셨다. 설날과 추석에도 아침에 제사만 지내고 가게를 열었다. 가게는 그럭저럭 잘되었다. 아버지는 장사에 수완이 있으셔서 손님들과 농담도 잘하고 가끔은 손님들에게 음료를 무료로 돌린다던가 자주 오시는 분들께 몇 권의 책을 공짜로 보여주는 서비스로 손님들을 끌어들였다.
그 당시 만화방과 당구장의 손님들은 가게 안에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피웠다. 지하실에 있는 만화방에 환기가 될 리 만무하고 가게는 항상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계단 밑 조그만 공간을 분리해서 그곳에서 먹고 잤던 우리 가족의 옷에는 담배 냄새가 가득했다.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내 옷 냄새를 맡고는 담배 피우냐는 질문을 여러 번 하셨고 내 상황을 설명드리면 그제야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셨다.
어릴 때는 우리 집이 만화방인 게 좋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만화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게에서 먹고 잤기 때문에 하루 종일 가게에 있었고, 가게가 바쁠 시간이 아니면 새 책을 봐도 아버지께서 뭐라 하지 않으셨다. 만화책을 보는 것도 실력이 느는지 어떤 날은 하루에 80권을 본 적도 있었다. 같은 작가가 같은 장르를 반복적으로 그리기 때문에 그림만 봐도 내용이 떠올랐다. 방학 때는 아침 9시부터 밤 12시까지 만화책을 보다 보니 만화책이 나오는 속도보다 내가 읽는 속도가 더 빨랐다.
가게에는 손님에게 팔기 위한 과자와 음료수, 라면이 있었다. 나는 사장 아들이라 아무런 제재 없이 그것들을 먹었다. 책을 읽으며 과자도 먹고 음료수도 먹고 라면도 먹고... 그러다가 아버지 어깨를 조금 주물러 드리면 자장면도 시켜주셨다. 나는 만화책이 좋아 바깥 활동을 하지 않고 가게 안에서 만화책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적 유일한 불만은 가족들과 함께 놀러 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내가 기억하는 가족 여행은 단 두 번이었다. 막내 고모에게 가게를 맡겨두고 2박 3일로 떠난 남해 해수욕장 여행과 또 막내 고모에게 가게를 맡겨두고 떠난 불국사 여행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족들과 어릴 적 추억은 이것이 전부였다. 그 두 번의 여행을 제외하고는 365일 매일같이 9시에 가게문을 열고 밤 12시에 가게문을 닫았다.
중학생이 되면서 장사하시는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쌓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만화방과 당구장을 가지 마라고 말씀하신다. 그 당시 PC방이 없어 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딴짓을 할 수 있는 곳은 만화방과 당구장, 오락실이 유일했다. 그런데 나는 만화방 집 아들이자 당구장 집 아들이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아버지는 근처 당구장을 인수하셨고, 만화방은 어머니께 맡기고 아버지는당구장을운영하셨다.
졸지에 나는 학교에서 알게 모르게 유명인이 되었다. 청소년 유해시설인 만화방과 당구장의 아들인 나는 선생님께 의도치 않은 수모를 겪어야 했고, 친구들의 은밀한 따돌림을 버텨야 했다. 대놓고 나를 따돌리는 친구는 없었지만 '만화방', '당구장'이라고 놀리는 친구들의 말에 그 당시 사춘기였던 나는 상처를 받았다.
학기 초가 정말 싫었다. 학년이 바뀌면 선생님은 늘 호구조사를 하셨다. 부모님 학력, 직업, 사는 곳을 적어야 했다. 각각 고졸, 중졸인 부모님의 학력이 부끄럽지는 않았지만 부모님의 직업은 부끄러웠다. '만화방, 당구장을 가지 마라'는 교과서의 내용과 달리 내가 사는 곳이 만화방이고 부모님께서 만화방과 당구장 사장님이셨기 때문이다. 매년 초 인적사항 조사를 할 때 부모님 직업에 장사라고 적었지만 선생님들은 짓궂게 어떤 장사인 게 추궁하듯이 물어봤고 나는 결국 고개를 떨구며 만화방이라는 말을 해야 했다. 매년 그렇게 공개적인 망신의 시간이 되풀이되었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같이 어울리면 안 되는 대상이 되었다. 가끔 노는 친구들이 나와 친해지려 했지만 그 이유는 당구장에서 공짜로 당구를 치기 위해서였다.
부모님이 평범한 직장인이었으면 좋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그랬다면 친구들에게 놀림도 당하지 않고 선생님의 비웃음도 듣지 않았을 것이다. 장사를 하더라도 가끔은 가족들과 여행을 갈 수 있고, 놀림받지 않을 평범한 장사를 하시길 바랐다.
부모님께 다른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많이 드렸다. 차마 만화방이 내 별명이라는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반복되는 호구조사에 만화방이라는 글자를 적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했다. 부모님은 그게 무슨 대수냐고 듣지 않으셨지만 그 당시 나의 가장 큰 고민은 부모님의 직업이었다.
부모님의 직업이 나의 정체성이 되어 청소년기의 내 삶에 악영향을 끼쳤다. 자존감이 낮고 남 눈치를 봤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를 사랑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부모님의 직업과 상관없이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고, 진지하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었지만 부모님 직업을 핑계로 학창 시절을 허비했다.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기에 한눈팔며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부모님을 원망하며 허송세월을 보냈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님의 직업과 내 삶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그 당시 부모님을 왜 그렇게 원망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공부 못하는 것을 부모님 탓하고 대충 살았던 것도 환경 탓을 했다.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만화방 아들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무시했다면 아무 문제없었을 것이다.
이제 그 당시 부모님보다 더 많은 나이가 되어 보니 부모님 삶의 아픔이 느껴진다. 애들과 같이 놀아주지도 못하고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일해야 했던 치열함과 고단함에 가끔 가슴이 얼얼해진다. 열심히 살았던 부모님의 삶을 부정하며 제대로 살자고 외쳤던 아들은 부모님의 나이가 되어 인생을 쓴맛을 조금씩 맛보며 그 당시 철없이 외쳤던 말을 사과드린다.
성인이 되어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그 시절이 나이가 들고 아이들을 키우니 조금씩 이해가 된다. 요즘 어머니는 먹고 사느라 자식들 크는 것도 제대로 못 봤다고 서운해하신다. 그래서인지 손자들 크는 것은 제대로 보시려고 영상통화도 자주 하시고 음식 핑계로 가끔 집에 들러 아이들 얼굴을 보고 이내 가신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세월이 흘러서인지 모르지만 그때 부모님을 원망했던 마음들도 조금씩 옅어지고 있다. 다만 부모님의 힘들었던 시기에 위안이 되지 못하고 투정만 부린 것이 아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