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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직장인 Mar 29. 2020

피할 수 없는 인생의 종착역


죽음! 근원적인 공포


9살 어느 날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책을 읽다가 갑자기 심장을 파고드는 근원적인 공포를 느끼고 숨이 막혀 소리 죽여 울었다. 나는 필멸의 존재이고 나라는 인식을 가지고 살 날이 우주의 시간으로 찰나에 불과하다는 섬뜩한 진실을 알아버렸다.


지구의 정복자였던 공룡들과 거대 포유류조차 죽음 앞에 사라졌다. 지금의 인간도 결국 죽어 한낱 뼛조각이 된다는 차가운 진실을 9살에 알았다. 지금 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도 결국 죽을 것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버린 9살 아이는 인생의 의미를 잃었다.


내가 죽어 없어진다면 삶을 향한 내 노력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들일 노력이 아까워 헛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나의 시간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천천히 흘렀다. 인간은 결국 시한부의 인생을 살지만 남은 시간을 알 수가 없다.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환자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지만, 필멸자인 나는 조용히 죽음을 기다리기에는 죽음의 기약이 없었다.


이런 나의 고민을 부모님께도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부모님도 필멸자이고 어쩌면 죽음과 마주할 날이 나보다 더 가까운 불쌍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혼자 하며 가끔 숨 죽여 눈물 흘렸다.



불현듯 찾아오는 죽음의 그림자!


잠자다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며 깨는 경우가 있다. 온몸을 꽉 조이며 숨도 못 쉴 정도의 공포를 안겨주고는 나에게 죽음의 공포를 알려준다. 9살 이후 가위에 자주 눌린다. '너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며 내 귀에 죽음의 의미를 선사하고 불현듯 사라져 버린다.


학창 시절 친구들은 나에게 너무 생각 없이 산다고 말했다. 그 당시 나는 죽음을 생각하며 죽음에 짓눌렸다. 죽음과 비교해서는 다른 어떤 것도 무거울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외에는 의미를 둘 곳이 없었다. 친구들의 고민을 듣고 나면 그들의 고민은 너무 한심스러워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이봐 너는 100년 이내 죽을 거라고.' 이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죽음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조차 두려웠다. 내 입으로 죽음이라는 말을 하고 나면 죽음이 성큼 나에게 다가올 것만 같았다.

죽음을 피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을 알고, 죽음의 공포를 느낀 아이는 죽음과 최대한 멀어지려고만 했다. 중증환자가 입원한 병원에는 절대 가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를 보는 것이 두려웠다. 할머니께서 병원에 입원해 계셨을 때도 욕을 먹지 않을 정도만 방문했고, 이내 집으로 돌아왔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할수록 죽음의 공포는 더 커졌다. 가위에 더 자주 눌렸고, 환청이 들리며 가위로 인한 몸의 마비 증상이 오랫동안 지속되어 고통스러웠다. 계속된 가위로 인해 잠을 자는 것이 두려울 지경이었다.



죽음을 받아들이다.


삶이라는 소중한 것을 나에게 안겨주고는 이내 다시 거두어가느냐고 인생을 원망했었다.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바꿀 수 있었다. 내 삶을 통해 아이들이 태어났고,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내 삶이 사라지는 것은 이제 의미 없는 것이 아니다. 이미 세상에 큰 의미를 남겼기 때문에 이대로 사라지더라도 크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언젠가 죽음이 다가오겠지만 죽음조차 의미 있도록 준비해서 멋지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한달 #한달자기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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