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오면

이산 문학, [천진 시절, 금희, 2020]을 읽고

by Charlie Sung

1. 자본주의 시대의 오디세우스


‘기하급수적으로 커져가는 도시의 풍요로움이 내게도 한 상 차려질 것 같은 기분’이 도시로 사람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눈먼 희망이 소외된 사람들을 부추겼습니다. 이른바 ‘샤하이(下海) 시대’, 벽촌의 청춘들이 부푼 꿈을 안고 장거리 기차와 버스에 몸을 싣기 시작했을 때 자본을 향한 욕망은 이미 그 태동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동북 지방의 남산촌, 조선족 마을 출신인 상아와 무군도 이 같은 혁명의 시간에 천진행 기차 좁은 침대 위에 모로 누워 서로의 존재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부유하던 청춘, 상아와 무군이 마침내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격랑에 올라탄 것입니다. 천진은 휘황찬란한 미래를 선전하는 공간이었으며 번영과 기회를 보증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천진행 기차에서 상아가 맛봤던 애틋함과 설렘은 쓰레기 수거촌 근처의 남루한 거처에서 일거에 무색해졌습니다. 만성적 무기력함으로부터 벗어난 해방감은 달콤했으나 일시적이었습니다. 거칠게 마무리된 바닥과 낡은 창틀이 압도하는 공간에서 부와 신분 상승은 차라리 요행이라 말해야 했습니다. 천진 역 역전 광장, 고가의 제품이 즐비한 백화점 내부를 관통해 지나갈 때 자본주의는 금방이라도 성공의 사다리를 선사할 것처럼 친절했으나 상아와 무군에게 버리듯 쥐어진 것은 박탈감이었던 것입니다. 천진이라는 도시의 가장 문명한 모습을 눈앞에 두고도 제일 낙후한 생태를 살아야 하는 현실은 노골적인 조롱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상아는 천진에서 미래의 삶을 설계하고 정숙과 교감하는 등 자신의 세계를 일신하면서도 결코 밝게 웃은 적이 없었습니다.


자본을 좇아 여행하는 자본주의 시대의 오디세우스 서사는 더 이상 생경한 소재는 아닙니다만 상아와 무군의 여행과 떠남은 이중, 삼중의 구조적 열위로부터의 탈출이라는 점에서 간절함이 더합니다. 재중 동포라는 태생적 조건은 중국 주류 사회로의 진입을 어렵게 하는 눈에 보이는 장애물입니다. 이는 중국과 한국을 중계하는 중간자적 역할에 제한되는 상아의 직업으로 직접 상징됩니다. 한국으로 나와 고층 건물 유리를 닦는 상아의 남편은 로프에 몸을 의지하고 땅에서 떨어진 채 뿌리내리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 역시 중국과 한국 어느 곳에서도 정착하지 못하는 불안한 입지를 표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아는 농촌 출신으로서 도시의 가치들과 충돌합니다. 도시의 개방된 윤리관을 대면하면서 상아가 번민할 때 우리는 상아의 정서적 세계가 확장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농촌의 가치는 도시의 그것과 갈등할 때 감추고 싶은 구차하고 촌스러운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빈한한 자로서 상아와 무군이 경험하는 부에 의한 배제, 소외는 지금의 우리가 딛고 선 자리의 빈부 격차와 갈등을 새삼 상기시킴으로써 보편성 또한 획득합니다. 그들이 가진 부에 대한 희구 역시 우리와 하등 다르지 않습니다. 상아와 무군의 오디세이아가 낯설지 않은 이유입니다.


2. 애끓는 그리움, 이산 문학의 근간


두고 온 고향 산천과 친족, 더 나아가 민족에 대한 애끓는 그리움은 이산 문학의 근간입니다. 재중 동포를 향한 일부 혐오 정서와 그로 인한 긴장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희의 ‘천진 시절' 곳곳에서 뿌리에 대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중 가장 인상적인 세 곳은 꼭 언급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중국과 한국 어느 곳에서도 주류로 인정받기 어려운 재중 동포 삶의 난처함을 고려했을 때 고향과 뿌리에 대한 그들의 애정은 다소 미련해 보일 만큼 일방적이라서 읽는 우리로 하여금 비감에 잠기게 합니다.


첫 번째는 재중 동포들의 우리식 먹거리 사랑입니다. 물론 넉넉하지 못한 환경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겠으나 막김치를 일상의 밥상에 올려 즐기는 모습에서 우리 민족의 오랜 식습관을 발견합니다. 상아 동생의 결혼식 날 어머니가 버무려 놓은 막김치의 사각거림은 곧 이어질 한국식 결혼식을 예비하는 전조가 되는 것만 같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막김치의 투박한 생활감은 김치가 우리 음식이라는 그 어떤 증거보다 명징해 보입니다.


결혼식장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키기 위해 설치된 샴페인 분수 옆에 ‘조선식'으로 차려진 잔칫상에서도 재중 동포들의 우리 전통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상해의 유행에 민족의 전통을 더하는 일은 중국인과 일본인 앞에서 제나라 사랑을 과시하기 위한 것도 이국적 정취를 꾸며내기 위한 의도적 장치도 아니었습니다. 조선식 한상차림은 응당 한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 그들 의식의 일부였던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등장한 그 자연스러운 모양새에 그것도 샴페인 분수 옆을 차지한 그 위상에 작지 않은 감동을 받았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름대로 산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그에 대해 갖는 믿음이 예전보다는 덜 확고하지만 정성을 다해 이름을 짓고 그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는 관행은 여전합니다. 항렬을 따르거나 따르지 않거나, 한자어를 쓰거나 우리말을 쓰거나, 저마다 의미는 다르지만 무탈한 인생을 살아가기를 기원하면서 우리는 예나 지금이나 갓난아이에게 근사한 이름을 선물합니다. 병원 가는 길, 배추밭이 늘어선 어느 가정집에서 급하게 태어난 아이는 달에 산다는 절세미녀의 이름을 받았습니다. 상아(嫦娥). 20년도 더 지난 어느 날, 전설 속 미녀처럼 상아는 애인 무군을 뒤로하고 떠났습니다. 다시 남산촌으로 돌아왔을 때 상아(嫦娥)는 상아(尙雅)로 개명합니다. 이름의 의미와 실제 삶간의 인과관계에 대한 이해는 깊이 따질 것도 없이 토속 신앙의 영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진대 상아는 처연한 운명을 타고난 전설 속 인물로부터 탈피해 평범한 상아로의 운명 전환을 기도합니다. 우리 조상들도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삶이 매몰차고 가혹할 때 이름을 바꿈으로써 운명과의 화해를 시도했습니다. 이름대로 산다는 옛말은 우리의 말이기도 하고 재중 동포의 말이기도 한 것입니다.


3. 노동과 여성 인권 문제 제기를 통한 보편화 시도


상아와 무군 외에 ‘천진 시절'에서 관건적 위치를 점유하는 등장인물이 있습니다. 정숙과 춘란입니다. 정숙은 상아의 고등학교 선배로서 상아가 일하는 공장 인근 또 다른 공장에서 원자재 샘플을 관리합니다. 겨울 추위를 막기 위해 비닐막을 설치하기도 하는 협소한 목조 구조 안, 남루한 책상 위에서 정숙은 사장이나 그 휘하 관리인이 원하는 샘플을 찾아주고 재고를 관리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샘플을 찾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종일 자리에 앉아 외롭게 장부의 숫자를 맞추거나 소설책을 읽습니다. 작가는 정숙의 노동을 ‘현대 노동자의 무언극'으로 표현합니다. 언제나 대체될 수 있는 부품으로 전락한 노동자의 초라한 처지는 20세기 말 천진에서나 2021년 서울에서나 매한가지입니다. 작가는 정숙 외에도 무군과 희철의 파편화된 작업 장면을 묘사하면서 노동 소외를 이야기합니다. 영화 모던 타임스에서 하루 종일 나사못이나 조이는 일을 하는 찰리 채플린이나 반복적으로 박스를 포장하는 무군과 희철은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 대다수의 노동자들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통시적 노동 소외 현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천진 시절’은 일차적으로 보편성을 획득합니다.


고향에 내려와 천진에서 마지막으로 몸 담았던 직장에 퇴직 통보를 했을 때, 관리인은 ‘조선족'을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족속이라고 통째로 매도합니다. 소수로서 편견에 맞서야 하는 재중 동포들의 삶은 때로는 전 세계를 무대로 경쟁해야 하는 우리의 소수자적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재중 동포를 대표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해야 하는 일은 개인의 평판을 관리하는 소시민적 처세와 그 차원을 달리합니다. 우리는 재중 동포들이 변방의 소수 민족인 조선족을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대한민국이라는 뿌리를 대표하는 것을 보면서 소수자 삶의 고단함을 그리고 버겁게 주어진 소명을 함께 목격합니다. 재중 동포는 대한민국만을 대표하는 것으로 족한 우리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춘란도 상아의 고향 사람입니다. 주정뱅이의 딸 춘란의 성공에 대해서 상아와 정숙은 어쩐지 정당하지 않은 뒷거래의 존재를 예감합니다.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와의 은밀한 관계를 기반으로 부를 축적하는 춘란의 실체를 알게 되었을 때 상아의 윤리관은 세차게 흔들리지만 이내 확장합니다. 그리고 상아의 생각은 정숙의 말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가난을 증오한다고. 같이 가난하게 만드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도 증오한다고.’ 속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누적되는 부의 과실을 정당한 수단으로는 나눠 가질 수 없는 여성의 삶을 그리고 그것에서 파생되는 여성의 열악한 권리 문제를 춘란의 당당함을 통해 그리고 상아와 정숙의 개안(開眼)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작가 금희는 노동과 여성 문제를 정밀하게 진단하며 ‘천진 시절'을 보편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우리 문학의 물리적 세계 확장


우리는 우리말로 쓰인 ‘천진 시절'과 같은 작품을 이야기할 때 우리말 소설의 물리적 세계 확장 가능성 또한 언급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우리 문학은 그 치열한 창작과 탐구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성취를 국제적으로 크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 원인으로 꼽히는 것이 번역의 어려움이었고 또한 ‘물리적 세계의 협소함’ 그리고 그에 따른 ‘소재 빈곤’이었습니다.


번역의 어려움은 정도의 차이가 있겠지만 타 언어에도 동일하게 해당하는 문제입니다. 결국 우리 문학이 인류 보편의 문제로 나아가고 더 창의적인 경지에서 진화하려면 우리말을 쓰는 작가들이 디딘 땅이 넓어져야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우리 문학이 더 깊은 수준에서 세계인의 공감을 이끌어내 종국에는 인류의 삶에 기여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라는 공간적 제약을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생활권의 확장은 경험하는 이야기 범주의 확장이고 부대껴야 하는 인물 성격의 확장입니다. 창작 영역에서 이야기와 성격의 확장만큼 결정적인 도약의 계기를 생각할 수 있을까요. 우리 문학의 숙원인 노벨 문학상 수상도 물리적 세계 확장을 토대로 조금은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치게 방정맞은 생각일까요.


국제적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문학상 수상 여부가 우리 문학의 실제 수준과 역할을 평가할 결정적 근거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중 유력한 일부를 수상한다면 우리 문학의 위상이 높아질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국내 작가들과 우리말 창작이 가능한 재외 동포 작가들 간의 건전한 경쟁 위에 우리 문학계의 지원과 관심이 지속된다면 우리 문학이 마침내 소재 빈곤이라는 난관을 넘어 그 노력과 성취를 광범위하게 인정받게 되는 날도 가까워지지 않을까요. 재외 동포 작가들의 우리말 창작물은 우리 문학계에 신선한 자극임이 분명해 보입니다.


5. 그날이 오면


‘시간 단위로 잴 수 없는 막막한 기다림, 그러나 언제든 반드시 오리라는 충만한 확신감,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잔치의 서막이었다.’ ‘천진 시절’ 중 제가 가장 좋아하는 문장입니다. 어린 시절 완벽했던 결혼식을 회상하면서 상아가 하는 말입니다.


어쩌면 저는 그 옛날 지금 중국의 북방지역 더 멀리는 중앙아시아로 떠날 수밖에 없었던 우리 선조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시간 단위로는 결코 잴 수 없는 막막한 기다림 속에서도 언젠가는 우리 모두가 원래의 자리에 모여 평화를 논할 수 있으리라는 충만한 확신감을 금희의 ‘천진 시절'을 읽는 내내 곱씹었습니다. 우리 민족이 모인 잔치의 그날을 기다립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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