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그 숙명에 대하여

[엄마의 말뚝, 박완서, 2012]

by Charlie Sung

1. 화해


박완서 선생님은 본인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여성 운명에 대해 모순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음을 고백한 바 있습니다. 여자가 일을 통해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않고는 남녀평등이란 한낱 구호나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도 딸이 직장과 육아라는 양자택일의 궁지에 몰렸을 때, 여자는 뭐니 뭐니 해도 가정을 잘 지키고 아이를 잘 길러야 한다고 타일렀다면서 말입니다. 1986년 발표한 산문집 '서 있는 여자의 갈등'에 수록된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이라는 제목의 글 말미에 놓인 이 고백은 조금은 쓸쓸하게 읽힙니다. ‘엄마의 말뚝’ 연작 중 1편이 1980년 문학사상을 통해 발표됐으니 6년여의 시간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여성 인권 운동 분야의 선구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와 그녀의 딸이자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를 연상시키는 박완서 선생님 모녀는 생전에 ‘황금빛 새장'으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삶에 대한 어머니의 억척스럽고 미련한 태도와 노골적인 이중성을 모질게 몰아세웠던 '엄마의 말뚝' 연작에서와 달리 선생님은 늦게나마 어머니의 삶과 화해를 청합니다. 잠복한 채 삶의 고비마다 불청객처럼 모습을 드러낸 여성성에 대한 모순을 끝내 떨쳐내지는 못했을지라도 그와 어머니가 일생 동안 실천한 여성 지위 향상을 향한 소망과 노력이 작으나마 힘이 되었음을 겸허히 자부하기도 하고요. 선생님의 딸까지 포함하는 3대의 시간에 걸쳐 형성된 이 모순과 이중성의 촘촘한 자장이 개인의 삶을 희롱한 운명에의 저항을 가능하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요. 모순 위에 선 숙명을 기꺼이 살아 낸 개별자들의 이야기가 바로 ‘엄마의 말뚝’ 연작이 아니었을까 짐작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엄마의 말뚝' 연작은 모순과 이중성에 대한 이야기로 새로 읽힐 가능성을 미리 내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2. 모순, 그 숙명에 대하여


선생님은 상상 꼭대기 현저동 문간방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의 모순을 처음 목격합니다. 생리혈 묻은 속옷 빨래를 맡기는 엄마라는 작자, 본처와 첩을 부모님과 한 집에 데리고 사는 아비라는 위인을 '천하의 상것'으로 하대하던 어머니는 본인의 우월한 뿌리를 그토록 매정하게 박차고 떠나온 박적골, 시댁에서 찾고 있었습니다. 하찮은 복통으로 남편을 먼저 보내면서, 재롱이나 보자는 심산일 뿐 손녀의 진지한 교육에는 무관심한 시부모님의 시대착오를 성토하면서 진저리를 치고 말았던 그 박적골에서 고상함과 교양의 근거를 찾아내는 어머니의 이중성에 선생님도 마찬가지로 진저리를 치게 됩니다. 이 최초의 모순은 박적골에서 만끽하던 자유의 공간과 독점하던 애정에 대한 그리움을 자극하며 선생님의 순조로운 서울 적응을 훼방합니다. 우리가 떠나 온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의 근거와 우리의 사는 곳은 왜 달라야 하는가. 그는 답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떠나 온 뿌리를 끝내 잊지 않고 가끔이나마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께서 견지한 이 같은 삶의 근거 즉 말뚝에 대한 이중적 해석 때문 아니었을까요.


선생님이 경험한 두 번째 모순은 '엄마의 말뚝' 연작에서는 설명되지 않았고 앞에서 언급한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에서 등장합니다. 현저동에 살던 시절, 바닥에 억센 석필로 ‘한도바꾸’ 든 신여성을 그리는 것 외에는 선생님에게 다른 놀거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엔가는 그가 바닥에 그린 신여성에 대고 꾀죄죄한 몰골의 동네 사내아이가 오줌을 내갈겼다고 합니다. 선생님은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다소 덜떨어지기까지 한 그 사내아이를 흠씬 두들겨 패줬다고 해요. 평소보다 훨씬 사나워져서는 그 녀석 얼굴에 손톱자국까지 남겼다고 합니다. 사내아이의 어머니에게 붙잡혀 한참 곤혹을 치르고 난 후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도착했을 때 그는 우군의 등장에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순간뿐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어머니는 또 다른 모순을 내비쳤으니까요.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 운운하며 '신여성'의 사명을 강요하면서도 어머니는 '계집아이의 드센 성격'을 타박하며 오히려 선생님을 나무란 것입니다. 그 뜻밖의 꾸짖음에 선생님은 어쩌면 처음으로 여성의 한계를 예감했을 것입니다. 사소한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에서도 감히 대거리할 수 없이 남성의 권위는 견고했으며 대결의 와중에서는 같은 여성의 지지 조차 받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선생님이 삶을 통해 보여주신 남녀평등에의 확고한 의지는 그때 그 자리에서 깨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 모순은 이념과 체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선비의 지조와 가족애를 타고난 그의 오빠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좌익 운동에 헌신했으나 숙고 끝에 전향하게 됩니다. 이 사건은 가족의 운명에 비극의 단초를 제공합니다. 선생님의 가족이 몸부림치며 도망치려 했던 그 비극은 다름 아닌 인민과 백성의 안녕과 행복을 위해 설계됐다는 이념과 체제로부터 비롯한 것이었습니다. 이념과 체제에 의해 어머니는 정신에 병을 얻었고 오빠는 정신과 몸 모두에 병을 얻었습니다. 어머니는 생사의 길목에서 발버둥 치며 다시 그 비극을 마주해야 했고 오빠는 그 비극에 의해 더운 숨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좌익의 본심과 국민을 듣기 좋은 말로 달래 적 치하에 팽개치고 저희끼리 뺑소니친 우익의 민낯 그리고 세상의 주인이 바뀜에 따라 돌변하는 민심은 선생님 가족으로 하여금 인간과 체제에 대한 불신, 회의를 학습하게 했습니다. 선생님은 이때부터 거대한 운명에 의해 짓밟히는 작은 단위의 개별성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하늘에 맺힌 원한을 어찌 잊으랴. 그러나 덮어둘 순 있었다. 나는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아 또 사랑하는 걸로, 어머니는 손자를 거두어 기르며 부처님께 귀의하는 걸로.’ 선생님은 원한을 결코 잊지 않았고 또 삶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선생님의 가족은 사랑하고 귀의함으로써 주저앉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택합니다. 몰인정한 운명에의 묵묵한 저항이었습니다.


모순과 이중성은 이렇듯 '엄마의 말뚝' 연작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스스로의 모순을 경멸하며 그 모순의 박멸을 위해 몸부림하는 것이 우리를 바로 살게 하는 일일까요. 오히려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힘, 그 긴장 사이를 끊임없이 왕복하는 번민이 생에의 의지를 놓치지 않게 우리를 붙들어 준다고 생각합니다. 모순을 통해 우리는 한쪽 끝에 선 채 대척에 자리한 상대를 혐오하지 않고 마침내는 화해와 공감의 가능성을 확보합니다. 우리는 이것과 동시에 저것도 취할 수 있는 유연함을 또한 모순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운명과도 화해하고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과도 연대하게 하는 힘을 우리는 모순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마침내 모순을 긍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는 창과 어떠한 창도 막아내는 방패 그 사이 어딘가에 살 수밖에 없는 숙명을 타고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하여


어머니의 민낯을 차가운 시선으로 폭로하는 딸의 본심은 ‘엄마의 말뚝' 연작에서 세 단계를 걸쳐 서서히 변화합니다. 깊이 사랑하는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피해자의 억울함에서 빈한한 여성으로서의 삶을 공유하는 동지애로 변하는가 하면 마지막에는 한계를 규정할 수 없는 어버이에 대한 효심과 사랑으로 진화하는 것입니다. ‘엄마의 말뚝’ 연작의 여백에는 이 감정 변화가 희미하지만 분명하게 자리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차마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책의 여백을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드러나지 않는다고 부재를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고통으로 신음하는 어머니의 삶에 대해 철저하게 객관적일 수 있는 자신의 독종과도 같은 작가적 근성에 수치감을 느끼는 한편 ‘엄마의 말뚝' 집필하는 동안 책의 곳곳에서 사랑과 연민의 감정으로 흔들렸다고 제5회 이상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고백한 바 있습니다.


어머니의 표리 부동성에 과격한 적대를 표현한 작가의 ‘말' 이면에 감춰진 연대와 공감의 감정을 우리가 송두리째 알기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의 일부만이라도 이해했다면 ‘엄마의 말뚝' 읽기에 성공한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날 선 비난의 ‘말'은 넓게 이해하고 깊이 존경하기에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는 온정의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엄마의 말뚝'은 비통한 가족사를 폭로한 나일론 딸이라는 세간의 오해에 대한 조목조목 한 해명으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또한 포장된 효, 전시성 가족애를 부끄럼 없이 과시하는 이들에 대한 따끔한 일침일 수 있습니다. ‘엄마의 말뚝'은 투철한 작가 정신이 초고를 쓰고 절절한 애정이 퇴고한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4. 책 읽는 일에 대하여


남의 글을 읽고 감화 되어 회심하고 그리하여 더 나은 삶을 살게 되는 일은 아주 드물게 일어납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저는 독서의 주요한 목적이 개과천선 즉 스스로를 교화하는 일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독서의 효용은 오히려 다른 사람, 다른 삶을 이해하는 데에 있다고 믿습니다. 독서의 방향은 내면이 아니라 밖을 향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다양한 독서 경험은 그 경험의 수만큼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전체로서의 삶'의 의미에 우리를 성큼 다가가게 합니다. 박완서 선생님의 글을, 소설을 읽는 것은 제게 박완서 선생님 그리고 그의 어머니의 삶이 표상하는 의미를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엄마의 말뚝' 연작을 읽음으로써 저는 격변하는 시대의 희롱과 육박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개별성으로서 두 인간의 삶을 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전체로서의 삶'의 의미에 전보다 조금 더 다가갈 수 있었습니다.


여간 쑥스럽지 않은 이 졸문이나마 쓰게 한 것도, 거대한 운명 앞에 놓인 제 인생의 미약한 질량과 아직은 깊이 박히지 못한 채 표류하는 제 말뚝의 좌표를 가늠해 보는 기회를 갖게 된 것도 선생님의 글 덕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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