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번 맡은 배역과 대사가 비슷한 역할극이다. 기철이는 화를 내고 명현이는 슬퍼한다. 기철이는 거창한 말들이 싫다. 그 말들 안에서 질식하는 삶들이 안타까워 항상 화가 난다. 기철이는 그럴싸한 논리로 본질을 가리고 잇속은 철저하게 챙기는 돈 가진 사람들, 권력 가진 사람들을 혐오한다며 연신 소리를 꽥꽥 질렀다. “글쎄 평등이니 정의니 민주주의니 하는 선동질 좀 그만하면 안 되나. 그렇다고 진짜 그 사람들이 윤리적이냐고. 정의롭냐고. 아니잖아. 말로만 정의로운 척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짜 정의로운 사람이 필요해 우리한테는.” 기철이는 명현이에게 모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분을 삭이기 힘든 눈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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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2차 안주는 라면이다. 기철이는 가락국수가 좋지만 명현이가 오늘은 라면을 꼭 먹어야겠다고 우겨서 어쩔 수 없이 라면을 시켰다. 포장마차 주인아주머니는 손이 빠르다. 달걀을 휘젓는 손 주위로 손 모양 잔상이 뿌옇게 남는다. 손이 동그래졌다. 포장마차의 라면에는 달걀과 파만 들어간다. 옷차림이 근사해서 한몫 잡겠다 생각했던 포장마차 아주머니는 고작 라면 두 그릇만 시킨 사내들이 얄밉다. 닭똥집 모양으로 입이 튀어나온 채로 라면을 던지듯이 내놓는다. 라면 국물이 찰랑거렸고 면 한 가닥이 그릇의 목 위로 살짝 넘어왔다. 기철이와 명현이는 비싼 안주는 안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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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을 먹는 명현이의 뿔테 안경에 김이 서렸는데 명현이는 안경을 벗지 않는다. 라면 덕에 서리는 김이 좋다고 했다. 앞이 흐릿하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얼마 뒤 김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명현이의 슬픈 눈이 드러났다. “얼마 전에 영화를 보니까 라면에 비싼 부위의 소고기를 넣어 먹는 사람들이 있더라. 그리고 어떤 형제는 라면 끓이다 화재로 죽었고. 라면 하나도 공평하지가 않아.” 면이 설익었을 때 다 먹어야 한다고 명현이는 말을 끊고 다시 라면에 집중했다. 포장마차 라면에서는 소주 냄새가 나고 어묵 냄새도 난다. 명현이의 안경알이 다시 하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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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철이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고 소주잔을 내리쳤고, 명현이는 권력과 부의 민낯은 거의 비슷하니 말뿐일지라도 없이 사는 우리들 편 들어주는 사람을 밀어줘야 되지 않겠냐고 말했다. 가면 벗으면 다 똑같다고 했다. 그러고는 자본주의니 공정한 경쟁이니 자유 시장이니 학교에서 배웠지만 본인들 삶에 큰 이익도 해도 주지 않는 이야기들을 하다가 결국 자정을 넘기고 말았다. 기철이는 아내의 성난 문자를 받고 서둘러 계산했고 명현이는 아내에게 온 부재중 전화 다섯 통을 확인하고는 탁자에 머리를 박았다. 둘은 인사도 않고 택시를 향해 날듯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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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내내 머리가 깨질 것 같은 두통과 격렬한 구역질에 고통받은 둘은 점심 즈음에야 정신을 차렸고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해장국집 추천은 항상 기철이가 했다. 속 풀고 또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사무실에서의 시간은 평소보다 더디게 흘렀다. 퇴근길에 기철이는 상속세 인상 뉴스에 거친 욕을 뱉었고 명현이는 아파트 매매가 상승 소식에 안도의 날숨을 토했다. 기철이는 연로하신 부모님께 물려받을 재산이 꽤 있었고 명현이는 무리한 빚을 내서 장만했지만 제법 괜찮은 지역에 아파트가 한 채 있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