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by Charlie Sung

충무로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 '8월의 크리스마스'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영화를 다시 본 감동이 귀신이 뀐 방귀 냄새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몇몇 장면을 골라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영화의 거의 모든 신이 명장면이라 선정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 정원 남매는 어느 무더운 여름날 마루에 앉아서 수박을 먹습니다. 정원이 좋아했던 여동생의 친구 이야기부터 정원이 앓고 있는 병에 대한 이야기까지 둘의 대화는 정원을 불편하게만 합니다. 남매는 머쓱해집니다. 서먹하고 어색해진 정원은 마당으로 수박씨를 뱉습니다. 이를 본 여동생도 함께 수박씨 뱉기에 동참하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정다감한 오누이로 돌아옵니다. 형제가 있는 사람들은 압니다. 형제간의 다툼이나 갈등이 얼마나 사소한 표현으로 해소되는지.

#2. 정원은 죽음이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쉽게 얘기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정원은 오랜 친구에게는 술에 취한 채 장난스레 고백하고 맙니다. '나 곧 죽는다.' 친구는 2차 핑계치고는 과격한 장난 아니냐며 정원을 나무라지만 정원은 얼마나 슬프고 무너져 내렸을까요. ‘술 먹고 죽자!'라고 외치는 정원은 얼마나 죽기 싫었을까요.

#3. 스쿠터를 고치러 왔다 비를 만난 정원에게 우산을 씌워 주면서 다림은 답례의 의미로 술을 사 달라고 합니다. 어쩐지 사랑이 시작되는 느낌이 드는 장면입니다. 그리고는 빗속을 걸어가는데 비에 젖은 다림의 상의에 속옷이 비치죠. 영화에서 단 한 번의 애정신도 볼 수 없어서인지 몰라도 이 장면이 가장 관능적입니다. 노골적인 노출로 관객들을 자극하는 최근의 영화들과는 차원이 다른 고급스럽고 은근한 섹시함을 선사합니다.

#4. 다림과 술을 마시기로 한 날 정원은 사진관 안에서 비 내리는 유리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김광석의 '거리에서'를 흥얼거립니다. 빗소리와 '거리에서' 그리고 한석규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어찌나 잘 어울리는지 정원이 다림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만드는 장면이 아닌가 합니다.

#5. 정원은 약속을 어긴 다림이 야속하고 다림은 나타나지도 않은 자신을 걱정도 하지 않고 다그치지도 않는 정원이 밉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끌리는 두 사람입니다. 예쁘게 화장을 하고 사진관에 온 다림이 놀이공원에 가자고 수줍게 제안하는 장면에서는 다림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영화 속으로 뛰어 들어가 내가 대신 놀이공원에 가겠다고 외치고 싶을 정도입니다. 오징어를 가지런히 찢는 여자는 참 매력적이구나 생각했습니다.

#6. 낮에 찍은 영정 사진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다시 사진관을 찾은 할머니. 죽음을 준비하는 두 사람이 사진기를 사이에 두고 대면합니다. 할머니는 초연하지만 정원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천수를 누리고 죽음을 맞이하는 할머니를 부러워하는 정원의 눈빛에서 우리는 생의 의지를 봅니다.

#7. 감당하기 힘든 절망과 슬픔에 정원은 이불 속에 들어가 흐느낍니다. 하지만 혹시나 아버지가 들을까 봐 큰 소리로 울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울음을 단박에 알아듣고는 아들 방 앞에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행여라도 새 나갈까 봐 꽉 움켜쥔 정원의 절규와 구슬픈 빗소리를 들으며 마당을 무표정으로 응시하는 신구의 모습이 이 영화의 슬픔을 최고조에 이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때로는 오열보다 무표정이 더 아리고 슬픈 법입니다.

아내와 군산을 다시 찾은 것은 참 잘한 일입니다.

*코로나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 찍은 사진입니다. 무더운 날에 멋 부린다고 코트를 입었는데 미련한 자존심 때문에 벗지는 못하고 땀을 많이 흘린 기억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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