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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누구 있나요?

by 보라보라


며칠 전 이웃님의 <한전 아들내미>와의 일상 글을 보게 되었다.

그 글을 읽고 피식 웃다가 우리 집에 한전 아들내미라고 하기엔 늙었고.. 한전 삼촌뻘 되는 치즈군이 생각났다.


우리 치즈군은 어릴 적 하교 후 집에 가면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이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래서 아침에 등교할 때 거실 불은 켜놓고 나왔고, 하교했을 때 깜깜한 집보다는 환한 집이 덜 무서웠고, 포근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치즈군에게 전기불은 쓸쓸한 집을 환하게 비춰주는 따뜻한 불빛인 것 같았다.


photo-1580804328660-bcff6c66e800.jpg?type=w1 © ariel_kwon, 출처 Unsplash


반면 나에게 전기불은 할아버지와 등짝 스매싱이 생각나게 한다.


우리 할아버지께서는 전기불에 대한 남보다 깊은 사랑을 갖고 계셨던 것 같다. 혹시나 내가 덤벙거리고 전기불을 켜놓은 채 화장실을 나오면 귀신같이 알고 나타난 할아버지에게 등짝 스매싱을 당했다. 할아버지는 전기불이 혼자 켜져 있는 것을 매우 싫어하셨다. 특히! 화장실 전기불은 꼭 이용할 때만 켜는 것이라는 인식이 각인되어 있다.


덕분에 나는 어느 공간을 나올 때 꼭 뒤돌아 보고 텅 빈 공간이라면 무조건 전기불을 끄는 습관이 생겼다.


그리고 학창시절 전기 절약 포스터나 표어를 만들라고 하면 그 주제에 대해 뜨끔해 하며 어린 마음에 교장 선생님도 우리 할아버지랑 친구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고, 무언의 등짝 스매싱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photo-1577729886406-1547ee2879c2.jpg?type=w1 © azevdoluana, 출처 Unsplash


그 누적된 학습 효과가 엄청났었나 보다.

어느 순간 내가 우리 식구들에게 왜 불 켜놓고 나왔냐고 짜증을 부리고 있는 게 아닌가... 동생들도 어릴 적 나에게 한 소리씩 들으며 자랐으니 말이다.


전기불에 대한 생각이나 느낌이 전혀 다른 치즈군과 내가 한집에서 살게 되었으니 우리는 신혼 때 매일 전기불로 실랑이를 벌이는 달콤 살벌한 부부가 되었다.


신혼 때 매번 치즈군이 켜놓은 전기불을 쫓아다니며 묵묵히 끄다가 어느 순간 나는 폭발해서

"불 좀 끄고 살자. 이제 어두운 집이 무서울 나이 지나지 않으셨어요~. 저기요! 화장실 다녀온 꼬리 단속 좀 합시다. " 여러 말로 짜증도 내보고, 다독여도 보았지만 나도 어느 순간 지쳤다. 이후 말없이 덩그러니 켜진 전기불을 끄게 되었다.


이제는 외출할 때는 마지막 집안 점검은 내가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불 켜진 화장실을 보고 담담하게 말한다.


"저기요. 거기 누구 있나요? 치즈군 집에 우리 말고 또 누가 있나요~."


그럼 치즈군이 지레 놀랜다. "야, 차라리 화를 내. 갑자기 차분하게 말하니깐 무섭잖아. 불 끌게. "


"오잉~ 이게 효과가 있네. 이제 차분하게 말하겠어요. 치즈군~ 화장실에 누구 있나 확인 좀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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