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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보라 Jul 09. 2020

맨날 허우적대던 그때.


실패나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난 2013년 그때가 떠오른다.

나에게 나 스스로 <낙오자>, <억울>, <우울>이라는 단어로 약 1년 7개월 동안 날 괴롭혔던 그때.


© Counselling, 출처 Pixabay


결혼 전 스카우트로 회사를 옮기고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과 함께 그동안 찍힌 적 없는 금액이 매달 통장에 흔적을 남겨주었었다.

하지만 결혼하고 딱 10개월 만에 난 밀린 월급을 구제받기 위해 법률공단에서 상담받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이직한 회사는 신생회사였고 창업 후 초반 경영난이 해결되지 못하고 계속 적자를 내고 있었다. 그러자 사장님은 월급을 절반씩 주다 결국에는 밀린 월급이 3개월이 넘어섰고, 그사이 내 성과금 역시 받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난 밀린 월급 때문에 꿈같아야 할 신혼 생활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었다.

내 생애 첫 대출이 매달 버겁기 시작했고, 남편의 월급만으로 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나마 실업급여가 들어와 조금은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지만, 생활비를 쪼개 쓰면서 지난날 쉽게 냈던 카드가 무섭게 느껴지기 시작했었다.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난 기존 경력을 활용해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다.

경력직에는 서류심사는 대부분 통과했지만, 면접에서 매번 미끄러졌다.

신입직에는 나이 때문인지 서류 심사도 절반의 확률로 연락이 왔고, 어렵게 온 면접의 기회는 매번 놓쳤다.


면접 때마다 들었던 그 말.

매번 면접에서 날 기죽게 만들고 얼굴 붉게 만들었지만 매번 나도 똑같은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다.

면접관 "결혼은 하셨나요? 아, 기혼녀이시군요. 그럼 가임기 여성인데 임신하면 어떻게 하실래요?"

나의 대답 "결혼한 지는 1년 정도 됐습니다. 아직 2세 계획은 없습니다. 혹시나 임신을 한다면 부모님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임신보다는 저의 일을 더 중요시 여기고 있습니다."


어떤 면접관은 내게 지겹다는 듯 말했다.

"기혼녀들 대답은 다 똑같아요. 그런데 임신하면 일보다 가정이 중요하다고 울면서 말하면 답이 없어요."

난 그 말에 아무 말 못 하고 그냥 단념한 표정으로 면접관의 책상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면접관에게 인사하고 뒤돌아 나올 적마다 속으로 생각했다.

'당신 딸이 이런 면접을 봐도 똑같이 이야기할 거냐? 당신 딸도 꼭 나랑 똑같은 일 당할 거야! 당신도 회사 안에서만 부장이지 밖에선 그냥 나이 든 아저씨거든!' 저주를 퍼부었다.


면접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내 몸과 마음은 참 무거웠고, 지하철이나 버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은 바보처럼 느껴졌고, 내가 뭘 그리 잘못했나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 shauking, 출처 Pixabay


그리곤 친구이나 가족 그리고 남편에게 하소연을 했었다.

"결혼이 죄야! 결혼한 여자는 무조건 애 낳는 건 아니잖아. 애가 있더라도 일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나에게 직무 질문이 아니라 기혼녀라는 질문만 하는 거냐고!"


친구나 가족은 내게 말했다.

"그런 곳은 안 가는 게 좋아. 다른 곳 알아보자. 힘내! 더 좋은 곳에서 인재를 알아볼 거야."

남편은 힘없이 내게 말했다. "우리 혼인신고하지 말걸 그랬나.. 미안해. 괜히 나 때문인 것 같아."


이런 일상을 2달 동안 보내다 결국 내가 백기를 들었다.

나의 우울감은 극에 달했고, 매서운 눈으로 남편에게 스트레스를 풀기 시작했고, 넉넉했던 장녀가 아닌 깐깐한 장녀가 되어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바늘처럼 날카로운 말로 화풀이를 했기 때문이다.


나 스스로 내게 말했다.

'안 되겠다. 그들이 날 뽑지도 않고, 내가 창업할 큰 그릇도 아니다. 기혼녀여도 가임기 여성이어도 받아 주는 일을 찾아보자. 자격증이라도 따 보자. 새로운 공부를 하면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을까. 아직 서른 초반인데 내가 주저앉기에는 너무 젊잖아.'

차라리 정말 임신을 하면 모르겠는데 언제 임신할지도 모르는 이 상황을 벗어나려면 내가 새로워져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 난 생활비도 부족하니 국비 지원으로 받을 수 있는 교육을 찾아보았다.

그러다 발견한 국비 지원 전산회계 자격증에 도전했다.

그 교육은 전액 국비 지원이라 면접을 보고 수강생을 뽑았다. 면접 때 난 말했다.

"회계학을 전공했지만 이 자격증은 없습니다. 그리고 기존 경력이 회계분야도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누가 봐도 가임기 여성인 제가 다시 일할 사무직은 회계 분야인 것 같아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기혼녀이자 경력단절 여성을 대상으로 했던 교육과정이라 면접관들은 내게 말했다.

"이번 지원자들 중 제일 어려요. 재취업 의지가 있고 그쪽 공부도 했으니 우리 같이 해봅시다."


계속 떨어졌던 면접에서 난 정말 오랜만에 합격이라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남편에게 신나서 연락했다. "얼마 만에 합격이야! 나 열심히 할 거야!"


다시 시작한 공부. 학창 시절 공부가 이렇게 재미있는 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신났고, 집중하며 내가 다시 일을 하는데 밑거름이다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다. 노력한 만큼 결과가 나타나는 법.


난 국비지원 수업을 통해 회계 자격증을 2개를 땄다.


이후, 이 자격증으로 이력서를 넣기 시작했다. 하지만 거듭 서류에서 탈락했다.

국비지원 교육센터에서는 내가 가장 어렸지만, 문제는 회사에서 뽑는 나이 기준에는 난 경력자 나이에 해당되는 것이었다. 집에서 조금 멀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지역 범위를 넓혀 이곳저곳 열심히 새로 취득한 따끈한 자격증으로 이력서를 냈지만, 결국 안됐다.


'아.. 자격증만 있으면 다 될 것 같았던 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이라는 게 걸리는구나.' 체념하고 그 분야 아르바이트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알아보다 겨우 발견한 것은 <11개월 기간 아르바이트>였다.


그곳에서 연락이 왔다. "직급을 과장까지 달았던 분이 여기서 아르바이트가 가능하겠어요?"

난 연락이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았기에 말했다. "지금 구직 중 아르바이트를 찾고 있던 때라 하겠습니다. 대신 언제든 제가 중단 여부를 미리 말씀드리면 되는 거죠!"


난 그렇게 전 회사 퇴사 후 9개월 만에 갖게 된 나의 첫 직장이었다.


일을 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도 잠시뿐.


시작한 아르바이트는 사무 서비스업이었고, 공기업에 해당되며, 매달 지점별 업무 실적과 서비스 점수로 직원들이 바쁘지만 웃으며 일해야 하는 업무 강도가 높은 곳이었다.


난 그곳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사람 자리에 있었으며, 나의 행동 역시 지점 서비스 만족도에 포함이 되었기 때문에 입사 첫날부터 얼굴에 미소를 담아야 한다고 압박을 받았다.


미소라.. '우울감과 패배감이 가득한 지금 내게 미소를 지으라고 하는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이 아르바이트를 하지 말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얼마 만에 일하게 된 기회인데 무책임한 거는 싫다는 생각에 몇 달이라도 일을 하는 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일을 하면서 내 얼굴 표정을 근무시간 내내 신경 쓴 적이 없었는데 그 일은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였다. 나중에야 자동적으로 입꼬리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이 분야 업무도 쉬운 게 아니구나 느꼈었다.


또, 난 아르바이트생이지만 내 또래 여직원들과 친해지면서 작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그들은 과장이나 대리직을 달고 있으나, 난 그곳에서 아주 말단 아르바이트생이니 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 과거 이야기를 하는 게 어려웠다. 또 말해봤자 '그때는 그랬었는데 지금은 이래 그러니 무시하지 말아 줄래.'라고 밖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기존 경력은 그냥 사무직이었고, 결혼 후 업무 강도가 높아서 이직하기 전에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둘러대는 정도였다.


그사이 아르바이트 업무도 익숙해지고 편해졌지만, 월급은 적었고, 업무 역시 내가 계속할 일은 아니었기에 한 달에 한 번씩 주는 월차에 면접을 보러 가거나 취업 박람회에 참여하며 이직을 위해 계속 움직였다.


드디어! 10개월 동안의 아르바이트를 하다 제대로 된 면접 기회가 왔다. 일반 회사지만 규모가 있고, 집 근처이고 처우도 좋으며 내가 취득한 자격증으로 일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면접을 잘 보기 만발의 준비를 했다. 아르바이트 일이 내게 이때 스마일이라는 입꼬리 상승을 익숙하게 해 줘서 참 유용하게 써먹은 것 같다.


그 회사 면접에서는 오로지 일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리고 혹시 임신을 할 경우에는 대체인력도 가능하니 걱정하지 말고, 나중에 복귀하는 것도 문제 되지 않는다고 했다. 이 면접의 기회도 육아휴직에 들어간 직원 후임 자리라고 했다. 대신 기간제도 아니었다. 육아휴직 후 직원이 바로 복귀나 퇴사할지 여부는 모르지만, 회사가 일을 확장할 예정이라서 나중에 선임이 복귀를 한다면 업무를 나누게 될 거라고 했다. 난 앞뒤 안 따지고 기존에 귀에 박힌 "가임기 여성이네요." 이 말을 듣지 않는 면접이라 너무 좋아 무조건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었다.


30분가량 진행된 면접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내 입꼬리는 계속 올라가 있었고, 질문마다 열심히 대답했고, 특히 기존 경력과 지금 회계업무가 맞지 않을 텐데 어떤 사연이 있냐고 해서 사실대로 말했다.

이런 방황 속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고, 이곳에 합격을 한다면 회사 사람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일하는 기쁨으로 행복할 것 같다고 주절주절 원 없이 말했던 기억뿐이다.


그리고 다음날 결과가 나왔다. 합격!


아르바이트 기간을 한 달도 안 남긴 상황에서 난 합격한 거다. 아르바이트생을 관리하던 과장님 역시 내 합격 소식에 함께 기뻐해 주셨다. 그동안 내 이력에 대해 함구해 주셨고, 일하는 동안에도 그분이 날 많이 챙겨주셨었다. 너무 고마운 분이다.


그때 기분은 세상을 정말 다 가진 기분.

"이 세상이 날 버리지 않았구나. 우리 가계부도 다시 넉넉해지겠구나."


가족들도 좋아하고 함께 자격증 공부했던 언니들도 함께 기뻐해 줬다.

국비지원센터 담당 선생님은 본인 일처럼 기뻐하셨고, 국비지원으로 교육받은 수강생의 후기에 날 꼭 추천하겠다는 선생님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도 제일 기뻐했던 사람은 남편이다.

그는 전 회사 퇴사 후 그때까지 내 모든 모습을 지켜봤었고, 안타까워했기에 빨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길 바랐던 그의 바람이 드디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난 바로 이직을 했고, 새로운 회계업무를 시작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살면서 여러 시련도 있었지만 결혼 후 첫 시련을 이렇게 극복했었다. 힘들었던 1년 7개월..


지금 생각해도 너무 짜릿했던 합격 소식이었다. 이후 내 업무는 회계업무로 바뀌었고, 또 이런 경험을 바탕으로 다른 분야에 새로운 도전도 할 수 있었다.


바닥난 통장에 밀린 월급 그리고 계속되는 면접 낙방.

세상은 미래를 위해 결혼과 출산을 장려한다고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희망을 꿈꾸며 같이 살자 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그곳을 버리고 다른 시작을 준비했기에 이런 결과를 이뤄냈고, 우울감에서도 극복했던 것 같다.


또, 눈을 돌려 아주 세세히 다시 들여다보면 같이 꿈꾸며 잘 살아보자라고 북돋아 주는 좋은 곳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언제 어디든 선과 악이 함께하듯, 우리 현실도 그렇기 때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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