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로맨스가 필요해~♥

by 보라보라


얼마 전 엄마 생신이었다.

우리 자매는 분주하게 머리를 맞대고 무슨 선물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빠는 엄마 생일이 왔냐고 하시면서 새삼 선물을 뭘 하지 고민하시는 눈치였다.

어릴 적에는 아빠가 산타처럼 깜짝 선물을 가끔 주시기도 했지만, 요즘 아빠는 거의 오다 주웠다 식으로 그냥 툭 던져주신다. 그런데, 아빠가 엄마 선물을 고민한다고?라는 생각에 조금 놀랐다.


photo-1513201099705-a9746e1e201f.jpg?type=w1 © jessbaileydesigns, 출처 Unsplash


아빠가 혼잣말하시듯 내게 물었다.

"너네 엄마는 딱히 뭐해줄 게 없어. 가방 많지, 옷 많지.."


난 단번에 말했다.

"아빠가 엄마보다 옷 더 많아. 그런데 매번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입을 거 없다고 쇼핑하잖아! 아빠 남자보다 여자가 더 그런 거 갖고 싶거든! 엄마한테 아빠가 직접 선물한 적 없잖아. 이번에 제대로 선물 준비해봐."


내 말에 틀린 게 없어서 그냥 아빠도 웃는다.

그러다 생각나셨는지 한마디 하신다.

"이번에 아빠 친구는 와이프 생일 선물로 속옷 세트 사줬다던데 그거 할까?"

난 듣자마자 대답했다. "아빠, 그 이야기 부부동반 모임에서 들은 이야기지? 엄마도 아는 사실이지?"

아빠의 빠른 대답 "응."

난 코웃음 치며 말했다. "아빠, 엄마도 아는 사실인데 아빠가 속옷 선물해 줘 봐. 그럼 엄마도 바로 눈치채지. 친구끼리 와이프 생일 선물 똑같은 걸로 했다고 할 거 아냐!"


아빠도 웃는다. ㅋㅋㅋㅋㅋㅋㅋ"하긴 너네 엄마도 같이 들었지."




잠시 말씀이 없으셔서 고민 중이신가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아빠가 나에게 노트를 보여줬다.

"나 뇌 시술한 뒤로 글씨 쓸 때 너무 흘겨 쓰게 된다. 이거 알아보겠냐?"

편지를 쓰셨구나 직감하고 받아 든 노트에는 정말 못 알아볼 정도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아빠, 나도 컴퓨터만 써서 가끔 펜글씨 쓸 때는 연습해. 아빠도 연습해서 써야지. 무슨 글씨인지 못 알아보겠는데. 다시 써봐."


아빠는 혼자 구시렁거리신다. "아.. 갈수록 글씨를 못 쓰네. 원래 나 글씨 잘 썼는데.."

맞는 말씀이다. 아빠는 젊은 시절 글씨를 엄청 잘 쓰셨다.

그래서 어릴 적 서예학원을 열심히 다녔던 이유는 나도 아빠처럼 글씨를 예쁘게 쓰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한참 뒤 아빠가 다시 노트를 건네주셨다.

짧은 글이지만 아까보다 훨씬 좋아진 글씨체에 글을 읽어보니..



사랑하는 당신에게
결혼하고 처음으로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것 같네.
중략..
딸 셋도 잘 키우느라 고생했소.
예쁜 손자 손녀도 있으니 우리 여생 건강하게 행복하게 삽시다.



아빠의 글을 보고 내 마음이 짠했다. 이 글을 읽을 엄마도 가슴 뭉클하지 않으실까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무뚝뚝한 아빠가 다시 연애시절 아빠로 돌아간 것 같아서 아빠가 달라 보였다.

엄마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아빠는 연애 때 엄청난 로맨티스트였다고 하셨다.

글을 다 읽고 아빠에게 말했다. "잘 쓰셨네! 엄마가 좋아하겠다. 이제 편지지에 잘 옮겨 써야겠다."


아빠가 내게 예쁜 편지지와 봉투가 있냐고 물었다.

"나도 손 편지 안 쓴 지 오래라서.. 예전에는 항상 갖고 있었는데 이젠 없어."

아빠에게 근처 문구점이나 마트에 가서 문구 코너에서 한 장씩 파는 카드 있으니 직접 골라 보시라고 했다.


외출 후 돌아오신 아빠는 아주 흡족한 표정으로 내게 보여줬다.

딱 봐도 아빠 연세에 어울리는 스타일이 아닌가 ^^ (사실, 이 봉투를 보고 폐백이 생각났다. )


SE-37b05603-76f6-4ee6-8836-81b504265306.jpg 아빠가 직접 고르신 봉투


아빠는 열심히 편지지에 글을 옮겨 쓰신 후 내게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 이따 식당에 네가 갖고 와. 내가 따로 넣어갈 곳이 없잖아."

"올~~ 이벤트~~~ 봉투가 두둑해~~ 알겠어 내가 챙겨갈게."




예약한 식당에 온 가족이 모였다.

준비된 식사가 다 나오고, 생신 축하주를 건넨 후,

아빠는 엄마에게 "나도 이번에는 준비했네." 하고 수줍게 준비한 봉투를 내밀었다.

이럴 때 빠질 수 없는 우리의 추임새 "오~~ 울 아빠 금일봉을 준비하셨어~~"

엄마도 기분이 좋아서 "오! 고맙습니다." 하고 바로 그 자리에서 봉투를 열고 편지를 읽으셨다.


우리도 옆에서 소리 내서 읽어보시라고 재촉했더니 엄마가 편지를 직접 읽어주셨다.

애교도 없는 엄마가 편지를 다 읽고 갑자기 아빠 볼에 입맞춤을 하셨다.


온 식구들이 깜짝 놀랐다.


SE-12e63788-c64c-4426-be15-b0cca84722a3.jpg 기습 뽀뽀에 모두 놀랐다. ^^


"와~~~~" 환호성과 함께 두 분의 모습에 손뼉 쳐 드렸다.

공개적으로 볼 뽀뽀를 하신 두 분은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웃으셨다.


그리고 우리 세 자매가 준비한 가방을 선물로 드렸다.

선물 사러 간 날 갓 들어온 신상이자, 홈페이지 신상 품목에도 아직 오르지 않은 제품이라고 했다.

엄마가 무릎 수술도 하셨으니, 아빠와 편하게 나들이 다니시라고 가볍고 예쁜 가방으로 선물해 드렸다.


SE-e639abbc-0d24-4e04-8018-6efd1c01b695.jpg 우리가 준비한 엄마 생신 선물.


이날, 저녁 식사도 맛있었고, 엄마는 선물이 다 마음에 들어 기분 좋았고, 볼 뽀뽀받은 아빠도 기분 좋아 보이셨다. 우리 역시 두 분의 행복한 모습에 더 기분 좋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빠와 엄마의 모습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작은 선물에 이렇게 고마워하고 기분 좋아하시는 분들이 그동안 어떻게 다 감추고 사셨을까..

자식을 키운다는 게 고된 일이라는 건 알지만, 가장으로서의 무게에 아빠는 무뚝뚝해질 수밖에 없었나..

이번에 아빠는 무슨 생각이 들어서 금일봉에 편지까지 준비하신 걸까.. 아빠도 이제 마음에 여유가 생기신 걸까.. 아님 엄마의 아픈 모습을 보고 애틋한 마음이 솟아난 걸까..


이날 부모님의 모습을 보고 이제 두 분에게 필요한 건 황혼 로맨스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제는 자식에 대한 걱정보다 두 분이 젊은 연애 시절처럼 두 분만 생각하고, 서로 바라보며 그동안 고이 감추어놓은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 표현하시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또, 이런 행복한 모습으로 우리 옆에 더 오래오래 계시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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