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차 안에서 파란 하늘의 햇살 아래 초록 초록한 나무들 사이 진한 분홍 꽃나무를 보았다.
빠르게 지나쳐서 내가 잘못 봤나 싶을 정도였으나 짧은 순간 보았던 그 분홍색은 내가 좋아하는 색이었다.
여름에 피는 꽃나무? 진한 분홍 꽃이 있나? 무슨 나무지?
내가 좋아하는 조금은 진한 분홍색.
내가 첫 해외여행지에서 구매한 ZARA의 분홍색 니트가 생각났다.
쇼핑을 잘 못하는 내가 해외에서 처음으로 구매한 옷이었다.
화려한 색을 좋아하지 않는데 그때 그 분홍색의 고운 자태는 날 매료시켰고,
가격 역시 저렴했으며 옷의 길이 또한 엉덩이를 살짝 가려줄 정도로 적당했다.
그래서 쇼핑 좀 하는 사람 마냥 한눈에 반해 과감하게 구매한 옷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에게도 자랑할 만큼 내가 한 쇼핑 중 가장 탁월하지 않았냐라고 자부심까지 느꼈었다.
그래서 멋을 조금 내고 싶은 자리거나, 여행지에서 화사하게 사진 찍고 싶을 때, 내가 기분 좋을 때, 긴팔이라 한여름에 입지 못하는 게 아쉬울 정도로 그 옷을 자주 입었고, 좋아하는 옷이라기보다 사랑하는 옷이었다.
지인들에게 "넌 이 니트만 입니?" 핀잔을 들을 정도로 자주 입었고, 보풀이 올라올 적마다 한 올 한 올 잘라주며 더 신경 써서 입었는데 결국 너무 해져서 버려야 했다.
그 옷을 버릴 적에 버리겠다고 하곤 이번 한 번만 더 입고.. 하며 미루다, 결국 옷을 버렸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팠는지..
그 옷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났지만 비슷한 색을 볼 때마다 그 옷이 생각난다.
마치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 정도로 매력적인 색의 꽃나무가 궁금했고.. 어느 날 우연히 동네 산책 중 그 분홍색 꽃나무를 발견했다.
너무 반가운 마음에 재빨리 사진으로 검색해 보니 <배롱나무>였다.
여름에 공원에서 자주 보는 주황색 능소화만 여름 꽃인 줄 알았는데 벚꽃의 옅은 분홍과는 다른 진한 분홍색의 배롱나무. 조금은 기가 세 보이는 배롱나무 역시 여름에 꽃을 피우는 녀석이란다.
다른 이름으로는 백일홍 나무라고도 한다는 이 녀석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이다.
이사 온 이 동네에서 처음 맞이했던 여름.
짙은 초록이 가득하고 그늘 아래를 지나도 땀이 흐르던 여름.
동네 곳곳에 진한 분홍색의 배롱나무가 환하게 피어 있어서 우리 동네가 더 좋아진 여름이었다.
또, 그 옷이 생각나서 배롱나무의 꽃이 더 예뻐 보였던 것 같다.
김신회 작가의 <아무튼, 여름>을 읽고 여름에 내가 갖고 있는 기억이 뭐가 있는지 생각해 봤었다.
올해부터 나의 여름의 기억 중 하나는 이제 배롱나무가 한자리를 차지할 것 같다.
배롱나무 덕분에 좋아했던 옷을 떠오르게 되고, 그 옷 덕분에 행복했던 그때가 떠오르게 되었다.
그 옷을 버릴 때 마음이 아팠지만, 이제 매년 여름마다 그 색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여름이 기다려진다.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색이 흐려지고 있는 배롱나무.
여름내 나에게 예쁜 색을 보여주어 고마움을 느꼈다.
내년에는 내가 먼저 너의 꽃봉오리를 알아보고 인사해 주리라.
내년에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