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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깊은마음 Jun 18. 2021

인생의 성장통, 상실

(feat.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와 책 '인생수업')


매월 말 휴대폰 속 사진을 정리한다. 5월 사진만 1,372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 예쁜 순간, 좋아하는 사람, 일 속의 행복, 인터넷 서핑하며 지나칠 수 없었던 장면 캡쳐까지..천 장이 넘는 사진들을 정리하며 생각한다. 찰나에 대한 나의 욕심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바로 바로 사진 정리를 하지 않았던 게으름의 크기도 크다.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정리해야지' 했던 나와의 약속은 못 지킨지 오래다. 그래도 '흐르는 세월 속 남는 것은 사진뿐'이라는 말은 진리인 듯 하다. 한 장 한 장 사진들을 다시 보니 5월 역시 행복한 시간들로 가득 채웠구나. 흐르는 시간속에 어떻게든 그 순간들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이렇게도 많은 사진을 기록했나보다.


카페에서 머리를 식힐 겸 감상한 짧은 영화는 사진과 관련된 영화다. 다신 나올 수 없는 명작으로 유명한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멜로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 이 영화를 다시보는 사람은 있어도 처음 보는 사람은 나뿐일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이제라도 이 영화를 봤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넷플릭스 아니었으면 이 영화를 언제쯤 봤을까.(뜬금없지만 넷플릭스 고마워요) 명작에는 군더더기가 없다던데..'와! 이런게 명작이구나' 생각하게 만든 영화다.


영화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그저 평범한 하루 하루를 담담히 살아가는 사진사 '정원(한석규)'과 그 앞에 나타난 당당하고 솔직한 매력의 주차단속요원 '다림(심은하)'의 사랑과 이별, 죽음과 삶을 다룬다. 남자주인공이 죽음을 앞두고 삶을 살아가는 캐릭터라는 부분에서 최근 읽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 <인생 수업> 이 떠올랐다.



가장 고통스런 상실을 겪는 와중에도 삶은 계속됩니다.
온갖 상실과 고통이 당신에게 밀어닥치더라도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인생수업>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드리우는 햇살과 그 시각 잠을 자고 있는 '정원'의 모습, 학교에서 들려오는 구령소리의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죽음'을 비유하는 잠이라는 요소와 '새로운 생명'을 비유하는 낮, 햇살, 초등학교의 생동감 등이 한 장면에 그려지는 영화의 시작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대가 지나고부터 '장례식'장에 방문하는 횟수가 늘었다. 죽음이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는 이런 일상을 스토리 초반부에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친구 부모님의 장례식장을 다녀오는 정원의 모습과 그의 나레이션에서 이 영화의 결말을 짐작할 수 있다. 장례식장의 풍경들이 곧 자신에게 닥칠 모습이라는 것을 느끼는 정원의 모습은 보는 이마저 쓸쓸하다.


내가 어렸을 때 아이들이 모두 가버린 텅 빈 운동장에 남아 있기를 좋아했었다.
그곳에서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언젠가 사라져버린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


하지만 그는 대성통곡을 하거나 극심한 고통을 느끼거나 곧 다가올 죽음을 비관하며 불안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닥칠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사실 병원에 다녀와 약을 먹는 장면이 아니었으면 불치병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기 어려웠을 것 같다.



다만 발톱을 깍다가 마루청에 드러누워 잠시 반짝이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 술에 취해 파출소에서 소란을 피우는 모습에서 죽음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을 전한다. 정말 짧게 지나가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았나 싶다. 짧았기에 더욱 인상깊은 장면이다.


상실만큼이나 힘겨운 것은 '상실을 겪게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입니다.

<인생수업>


삶은 때로 언제 상실을 겪게 될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를 살게 만듭니다.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며칠을 기다려야 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병과 싸우는 모습을 무한정 지켜보고 있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중략) 그러나 영영 소식을 듣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앞으로 있을지 모르는 상실에 대한 불안감 역시 하나의 상실입니다.
어떤 결말이 나오든,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명백한 상실입니다.

<인생수업>


상실은 언제나 존재한다.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어느 순간 삶의 진실을 망각한 채 물건도 사람도 소유하려 하거나 영원한 만남에 기대를 갖곤 한다. 이해는 쉽지만 실천은 어렵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햇살처럼 찾아온 다림은 정말 여름날의 싱그러운 초록잎과 같다. 교통단속요원인 다림이 사진 인화를 위해 사진관을 찾으면서 둘의 관계는 시작된다. 잦은 만남속에 당당함과 새침한 모습으로 정원에게 호감을 드러내는 다림의 모습은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배우 심은하의 미친 미모가 영화 속 여주인공에 몰입하게 만든다. 어쨌거나 두 주인공은 서울랜드에서 데이트도 하고 밤길에 팔짱을 끼는 스킨십까지 하며 관계를 발전시켜 나간다.




때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 상황의 낯설음이나 익숙함이 아니라,
그 중간에 존재하는 시간입니다.
<인생수업>



데이트 이후 초원사진관의 문은 굳게 닫힌다. 다림은 정원이 아프다는 사실을 알지못한 채 계속해서 사진관 앞을 서성이고 기다린다. 뜨거운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유도 모른채 부재하는 정원을 기다리며 보고싶은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보고싶었던 마음은 서운함을 거쳐 분노에 이른다. 편지를 써보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기도 하다가 결국 분노를 참지못해 사진관을 향해 돌을 던진다. 그리움에서 분풀이까지 사랑에 빠진 다림의 감정 변화와 행동에서 나의 지난 연애가 오버랩된다.


삶에서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언제나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그 사이의 복도는 매우 좁고 길다.
변화는 대개 지금까지의 문이 닫히는 것으로 시작되는데,
그 문들의 이름은 끝, 완성, 이별, 죽음 등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불안정한 시기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시기는 닫혀진 문을 보고 슬퍼하면서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기입니다. 이 시기가 가장 힘이 드는 때입니다.
그러나 더 이상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바로 그때 새로운 일이 일어납니다.
새로운 시작의 문이 열리는 것입니다.

<인생수업 p.136>


갑작스럽게 닫혀버린 문을 바라보며 그 사이의 좁고 긴 복도에 서있는 다림의 모습이 보인다. 지금처럼 카톡을 주고받으며 무슨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는 시대이니 그 답답함이 얼마나 컸을까. 연락이 안되는 상황을 누구보다 싫어하는 나는 다림의 감정에 심하게 이입해 초원사진관에 함께 돌을 던졌다.



다림은 근무지가 바뀌고 다른 곳에서 다시 일상을 찾는다. 잠시 퇴원해 다림을 멀리서 지켜보는 정원의 모습이 그려지는데 정말 아련하다.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손으로 창밖의 그녀를 어루만진다. 정원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다림의 웃는 일상. 그의 감정은 어땠을까.



정원의 영화 속 직업이 사진사라는 점이 이 영화을 특별하게 만든다. 본인의 영정사진을 직접찍는 모습에서 사진이 갖는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죽음을 앞둔 정원마저도 사진기 앞에서는 밝은 웃음을 보인다. 누군가의 기억속에 남을 사진에는 무표정보다 밝은 모습으로 남고 싶은게 모든 사람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욕망 아닐까.


내 기억속에 무수한 사진들처럼 사랑도 언젠가는 추억으로 그친다는 걸 난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만은 추억이 되질 않았습니다.
사랑을 간직한 채 떠날 수 있게 해준 당신께 고맙단 말을 남깁니다.

                                                                                            - 8월의 크리스마스 '정원' 나레이션


죽기전 다림이 남기고 간 편지를 읽고 그는 조심스럽게 답장을 쓴다. 하지만 그 편지는 끝내 전하지 못한 편지로 존재한다.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지만 짧은 나레이션에서 다림에 대한 정원의 진심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


정말로 소중한 것은 영원히 간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당신이 느낀 사랑과 당신이 준 사랑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생수업 p.103>


영원한 사랑이 없다고 느꼈던 정원이다. 사랑도 시간이 지나면 추억이 된다고 말했던 그다. 하지만 죽음을 앞둔 정원은 다림과의 만남을 통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랑을 경험한 듯 하다.



다시 찾은 초원사진관을 바라보는 다림은 예전에 찍었던 본인의 증명사진을 보며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고 영화가 마무리 된다. 그 웃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힘들었던 좁고 긴 복도를 지나고 새로운 문을 여는 시작을 의미할까? 아니면 어디있는지 모르지만 정원 역시 본인을 사랑했다는 것을 느끼고 웃는 웃음일까?


상실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는 한눈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장합니다. 상실로 인해 고통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결국 더 강해지고, 더 온전한 존재가 됩니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별이라는 상실을 통해 그녀가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별은 그녀에게 성장통의 역할을 했는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나는 얼마나 많은 성장통을 겪게 될까. 여전히 마음 속 또다른 나는 진실에 저항할 준비를 한다.


여름날 만나 크리스마스 선물같은 사랑을 경험하고 이별한 두 젊은 남녀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만남과 관계, 사랑, 이별, 아픔, 죽음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대게 과거란 현재 이전의 시간이며 미래는 앞에 놓은 시간이라고 여기지만,
이것은 시간이 일직선으로 된 연속선상에 놓여 있음을 전제로 한 가정입니다.
(중략) 시간이 직선적인 것이 아니라면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인생수업>


'8월의 크리스마스'라는 영화 제목이 처음에 무슨뜻일까? 싶었는데 여름과 겨울이 한 문장에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존재할 수 있음을 표현하는 것 아닐까?


'상실'에 대한 내용을 기록했지만 영화 중간중간 정원의 가족과 아버지를 통해 행복한 일상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다. 홀로 남겨질 아버지에게 리모콘 작동법을 메모하는 정원의 모습에서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두 배우들의 감정 연기는 그야말로 명품이다. 자극적인 장면이 전혀 없어 심심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감동으로 와닿는 영화다. 가벼운 마음으로 플레이 버튼을 눌렀는데 보는 내내 마음이 가볍진 않았다. 오늘 같은 금요일 밤, 불 꺼진 고요한 장소에서 나홀로 감상을 추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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