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여행 사진첩을 꺼내 들고
새벽부터 여행 책자들을 뒤적였다.
문제는 잠시 육아휴직했던 지난 3월 일본 여행 이후로 아직 제대로 여행을 떠나지 못해서다. 캠핑이라도 2박 3일 찐하게 했어야 했는데, 올해는 그것도 여의치 못했다. 그런데다 주말 야구 직관 인스타에 깜짝 반응을 살피러 접속하자 내 지인들이 제주, 말레이시아, 발리, 베트남, 미국, 스웨덴 한 달 살기 보름 살기를 떠나 사진들을 잔뜩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또 시작되었지, 지난 여행 사진첩 탐방. 그렇게 가끔 떠나고 싶은데 상황이 안될 때 하는 나의 대체휴가법, 이번엔 스페인이다.
그때는 무작정 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배가 떠난 바르셀로나에 너무 가고 싶어서 특가 항공권을 발견하자마자(밸런타인데이 특가였지 아마 딱 하루만 진행한) 질러버렸다. 지금에 비하면 두 배 가까이 되지만 또 옛날에 비하면 엄청 저렴한 거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셀프 칭찬. 역시 질러야 해결된다고 지르고 나니 해결하게 되더라.
보름의 일정을 짜며 도시를 얼마나 바꾸었는지 모른다. 다시 생각해도 잘한 건 보름 동안 스페인만 돌아본 것.
바르셀로나에 오래 머물렀고, 생활자의 삶을 조금이나마 접해볼 수 있었고, 꼭 가야 하는 여행지가 아닌 내가 가고 싶은 곳만 다녀 여유를 느낄 수 있었으며, 길에서 만난 현지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때맞춰 꽃할배 스페인 편까지 더해져 한국인이 넘쳐나는 바르셀로나에서도 지인 찬스로 한국인 없는 맛집에 연일 갈 수 있던 것도 너무나 행복했다.
(그때 꽃할배 페이스북 팬페이지에 응모해 2등에 당첨되어 거한 사은품도 받았었더랬다)
두 아이를 두고 떠났던 여행인지라 주변의 참견 아닌 참견에 맘도 상했었고, 아이들이 생각보다 나를 찾지 않음에 서운해하기도 했었지.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도 매일매일 커졌었고, 시국이 시국이었던지라 그쪽에도 꽤 신경을 썼었지 아마.
우리는 결혼 후에 휴가마다 보통 일주일 꽉 채워 여행을 다녀오곤 했는데, 아이가 생기고 나선 그마저도 어려워졌었다. 그러다 정말 길게 보름간 떠났던 스페인 여행은 우리 삶에 많은 변화를 주었다.
가장 크게 변한 건 여행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 한 뼘 더 자랐단 사실이다. 그동안 나는 이민을 준비할 만큼 해외생활에 대한 로망이 꽤 컸었다. 하지만 그 여행을 통해 내 삶에 충실하며 여행을 재밌게 다니는 것의 즐거움과 행복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스치는 인연의 찰나였지만 그라나다의 버블 커플은 나에게 '컴백해서 열심히 돈 벌어 애들이랑 또 오자'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게 해 주었다.
또 크게 변한 건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진 것이다.
당시 나는 떠나고 싶은 열망은 높지만 겁이 많은 초보 여행자였다. 그전까지 긴 여행은 지인이 있는 나라로 가거나 정해진 코스만 가던, 그러니까 지인과 여행책에서 일러주는 자유여행의 맛만 보는 여행객이었다면, 이 여행은 혼자서 모든 일정을 짜고 고치며 미리 여행의 재미를 만끽해본 것이다. 석 달 전 여행을 준비하며 읽은 무수한 여행기며 스페인 관련 책들의 재미에 푹 빠져 이미 열두 번 스페인을 다녀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현지에서 생기는 도통 예측 불가능한 일들 그러니까 버스를 놓친다던지, 급 결혼 준비로 왕궁이 문을 닫는다던지, 에어비앤비 주인장의 여자 친구가 영어를 통 못 알아들어도 그 모든 게 웃고 넘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한 관광지에서 만난 한국인 여행객의 빼곡히 적힌 노트를 보며 여행은 공부한 것을 눈으로 확인하는 과정이 아님을 몸소 느낄 수 있었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엄마에게 작품 설명을 요구하는 한국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내 아이에게 해온 작품 관람에 대한 방식을 지금까지 고수할 수 있게 된 것도 다 이 여행에서 배운 것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여행 준비에 전혀 재미와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남편도 유럽 여행의 좌충우돌을 직접 겪으며 여행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돈보다 중요한 것은 소중한 사람과 오롯이 함께 하는 이 시간임을, 그리고 지금 해야 할 것의 진정한 의미를 그는 이 여행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고 회고했었다.
나는 해외여행을 자주 다니지는 못한다. 많아야 일 년에 한두 번이다. 그래서 가끔 너무 떠나고 싶은데 상황이 안될 때 나는 추억팔이로 여행 감성을 채운다. 그때 찍었던 사진을 보며 그때의 감정을 되새기고 그때 만난 도시의 추억을 곱씹는다. 다시 아이들과 그곳으로 여행 가는 상상을 하며 또 다른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추억팔이로 일주일을 버틸 힘을 얻었다. 당장 한 달 살기에 떠날 수는 없지만 다음 여행을 위한 기력을 얻은 셈이다. 아마도 올해 여름휴가는 이사와 아이 건강 문제로 떠나지 못하겠지만 겨울 그리고 내년에 갈 여행지를 꿈꾸며 어느 날 또 추억팔이를 할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