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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민재 Sep 01. 2024

소맥으로 만들 수 없는 인맥


사업을 시작하면 자연스레 주변 인맥에 기대게 된다. 그동안 알고 지낸 지인들이 도와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창업을 해보면 깨닫게 된다. 그 기대가 헛된 망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 역시 그랬다. IT 기업에서 13년을 일하면서 수많은 인맥을 쌓았다. 


리멤버에서는 ‘우주 인맥왕’이라는 타이틀까지 얻었다. 그런 인맥이 만들어지기까지 나의 간은 많은 수고를 했다. 지인들과의 안부를 위해 만난 술자리에서 함께 소맥을 들이켰다. 병권은 소맥을 말아주는 사람에게 주는 벼슬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친분을 쌓는 것이 곧 유대감이라고 생각했고, 언젠가는 도움이 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내 얼굴은 검게 타들어가고, 아내의 속은 비장탄처럼 하얗게 타들어갔다.


결국 남는 것은 술값 영수증

지인을 만나는 시간은 즐겁고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리고 언제일지 모를 도움을 약속받았다. 하지만 다음 날 보낸 이메일에는 답장이 없었다. 도움을 줄 수 없는 이유는 수없이 많았다. 시간이 지나면 다시 소맥으로 뭉치게 되고, 언제 도움을 요청했는지조차 잊어버린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날 때마다 실망만 쌓였다. 이전 회사에서 나에게 큰 호감을 보였던 사람들,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사람들조차도 사업을 한다는 내 말에 두 가지 반응뿐이었다. “왜 지금 창업했어요?” “잘 되실 것 같아요.” (아이템이 무엇인지도 말하지 않았다.)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많다.

아니면 그냥 잘난 척을 좋아하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혼란스럽게 만든다. 조직에서의 자신의 위치나 예산을 주무른다는 둥, 마치 당장 계약할 것처럼 말한다. 그리고는 소맥을 마시자고 한다. 기분 좋은 저녁자리에서도 거들먹거림은 계속된다. 만취 상태에서 그렇게 헤어지고 나면 공허해진다. 

다음 날 아침 안부 문자와 함께 메일을 보내면 답장은 뻔하다. "대표님께 보고를 해야 한다." "올해는 예산이 부족하다." 등등... 거들먹거리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소맥잔을 쥐고 권력도 함께 움켜쥐었다가 다음날 탄핵을 당하는 셈이다. 이제는 만나자마자 잘난 체하는 사람, 거들먹거리는 사람, 왕년에 잘나갔다고 말하는 사람은 모두 거른다. 사업에도 도움이 되지 않고, 심적으로도 공허해지기 때문이다.


사기꾼은 더 많다.

회사 홈페이지에 대표번호를 게재한 이후로 하루에 2~3통씩 꾸준히 광고 전화가 온다. 내용은 거의 비슷하다. “ㅇㅇ일보입니다. 이번에 스타트업 중소기업 광고비 지원 블라블라” “ㅇㅇ은행 직원들 방문 설명 듣게 해주면 혜택 블라블라” “정부지원사업 따려면 컨설팅 블라블라” 아주 다양한 내용으로 온다. 

사기꾼들은 항상 열심히다. 전화기 넘어로 동료들이 다른 회사 설득하고 있는 소리도 들린다. 요즘엔 이런 것도 기업으로 운영하나 보다. 창업 초기에는 홈페이지만으로 고객이 전화할 리 없다. 심지어 전 스타트업 때 창업 4년 차에서 언론 보도를 내도 고객이 전화 오는 일이 없었다. 나는 다르길 바랬던 것일까? 나는 아직 사기꾼에게 맛있는 먹잇감일 뿐이다.


도와주겠다며 접근하는 지인도 있다.

2~3년간 알고 지냈던 지인들이 창업한 뒤로 쭉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도와주겠다고 나선다. 화분 하나 보내지 않았을 때 이미 알았어야 했다. 직장생활에서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게 창업 후에도 이어질 거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런 도라에몽은 없었다. 도와주겠다고 접근한 사람들은 곧 자신의 속내를 밝힌다. 돈을 요구하고, 그 돈을 받아내려고 잘 보인다. 그리고 돈을 받은 뒤 실망만 안겨준다. 

이유 없이 도와주는 사람은 없다. 데일 카네기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들은 당신이 원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그들은 내가 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돈이며, 나는 그저 타겟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알고 지낸 사람이라도 믿어서는 안 된다.


인맥을 엑셀로 정리했다.

ChatGPT에서 사람의 분류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주었다: 기회주의자, 정치가, 열정적인 사람, 순수한 사람, 무념무상. 나의 인맥을 이 다섯 가지 분류로 나누고, 나와 잘 맞거나 맞지 않는 사람을 정리했다. 점수를 매겨 +부터 -까지 점수로 분류했다. 만날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인맥이 보였다. 나와 잘 맞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에게 투자하기로 했다.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주의자보다 어렵게 만날 수 있는 열정적인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다. 또한, 지금의 동료와 미래의 동료들에게 투자하기로 했다. 


엑셀 파일을 닫았다. 마음이 후련해졌다. 제품에 집중하기로 했다. 새롭게 만날 고객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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