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없으면 투표도 못한다는 충격적인 법안
미국인 절반이 여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정확히는 53.1%만이 유효한 여권을 보유하고 있다. 나머지 47%인 1억 4천 6백만 명은 여권이 없다.
이게 왜 문제냐고? 미국 유권자 자격 보호법(Safeguard American Voter Eligibility Act, SAVE Act)라는 법안이 통과되면 투표 등록을 위해 여권이나 이와 유사한 신분증이 필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한 번 안 가본 사람들이 투표권까지 박탈당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지도를 보면 상황이 더 심각해진다. 웨스트 버지니아(West Virginia)와 미시시피(Mississippi) 같은 주에서는 시민 4명 중 1명만이 여권을 갖고 있다. 나머지 75%는 여권 없이 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지역 대부분이 저소득층과 농촌 지역이다. 해외여행할 여유도 없고, 굳이 비싼 여권 발급비를 낼 이유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갑자기 투표하려면 여권이 필요하다고?
반대로 뉴욕(New York), 캘리포니아(California),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같은 부유한 주들은 여권 보유율이 높다. 돈 있는 사람들은 해외여행도 자주 가고, 여권도 당연히 갖고 있다.
SAVE Act 지지자들은 "불법 투표를 막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시민권자가 아닌 사람들이 투표하는 걸 방지하겠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은 "해외여행 안 하는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여권 발급에는 돈도 시간도 든다. 급행료까지 내면 수백 달러가 들어간다. 저소득층에게는 큰 부담이다.
더 아이러니한 건 이 법안이 오히려 공화당 지지자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여권 보유율이 낮은 주들이 대부분 공화당 텃밭인 빨간 주들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황당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카리브해 휴가 다녀왔어요?" "아니요" "그럼 투표 못해요." 이게 민주주의인가?
여권을 갖고 있다는 건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다는 뜻이다. 해외여행을 할 만한 여유가 있거나, 최소한 미래에 갈 계획이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여권이 없다는 건 그런 여유가 없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다.
이는 사실상 경제적 계층에 따른 투표권 차별이다. 부자는 투표하고, 가난한 사람은 투표 못 하게 만드는 셈이다.
핵심은 이것이다. 선거 보안을 강화하는 것과 투표 접근성을 보장하는 것 사이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
보안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신분 확인이 철저해야 한다"고 말한다. 반면 접근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투표는 기본권인데 경제적 장벽을 만들면 안 된다"고 반박한다.
문제는 이 두 가치가 서로 충돌한다는 점이다. 보안을 강화하면 접근성이 떨어지고, 접근성을 높이면 보안 우려가 생긴다.
사실 시민권을 증명하는 방법이 여권만 있는 건 아니다. 출생증명서, 귀화증명서 등 다른 서류들도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 이것들도 발급받기 쉽지 않다.
특히 나이 든 분들 중에는 출생증명서 자체가 없는 경우도 있다. 1960년대 이전에 태어난 사람들 중 일부는 병원이 아닌 집에서 태어나서 공식 기록이 없기도 하다.
결국 어떤 서류를 요구하든 일정 부분의 사람들은 배제될 수밖에 없다.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뜻이다.
정치인들의 속셈은 복잡하다. 공화당은 "불법 투표 방지"를 명분으로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민주당 지지층의 투표를 제한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민주당은 "투표권 침해"라고 비판하면서 이를 정치적 무기로 활용한다.
양쪽 모두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계산이 깔려 있다. 하지만 정작 피해를 보는 건 정치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일반 시민들이다. 여권 하나 때문에 투표권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사람들 말이다.
결국 이 논란은 단순히 여권 문제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누가 투표할 자격이 있는지, 그 자격을 어떻게 증명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여권 출국 스탬프 없으면 투표함도 못 찍는다니, 국경 없는 의사회는 있어도 국경 없는 유권자회는 없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