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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Dec 28. 2020

20.12.27.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영화감상

 
과거 고도로 발전된 문명은 전쟁으로 인해 붕괴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거신병은 7일 만에 세계를 불태우고 세계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잿더미 속에서 살아남은 인류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급기야 ‘부해’라는 독기를 내뿜는 균사와 거대해진 곤충들로 인해 큰 위협에 직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은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끈질기게 삶을 이어온다. 이 영화는 살아가는 방식을 묻는다. 다시 말하면 인간과 환경에 대한 얘기이다.
 
환경은 생물에게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는 자연적 조건이나 사회적 상황, 또는 생활하는 주위의 상태를 의미한다. 인간은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이다. 한편 인간의 다른 의미는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영화에서는 인간과 환경에 대한 두 가지 삶의 방식이 대표된다. ‘순응하거나, 저항하거나’ 그리고 나우시카의 시도와 헌신을 보여준다.

나우시카의 바람계곡은 사실상 소규모 부락 공동체로 볼 수 있다. 전쟁과 오염으로 개체수가 줄어든 인류는 전과 같이 방대한 규모의 국가를 이룰 수는 없었다. 바람계곡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변두리에 있어 외침을 받을 일이 적으며, 바람이 계속 불어오기 때문에 ‘부해’로부터 피해가 적어 숲을 이루고 경작을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오무의 허물을 거두는 등, 주어진 환경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살아간다. 이들은 부해에 의해 죽어가는 것조차 순응한다. 이들은 어떤 의미로 운명론적이다. 그러나 순응하는 것이 체념한 것은 아니리라. 이들은 다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이어간다.

반면 이들과 대척점에서 토르메키아의 사령관 크사나가 있다. 크사나는 저항하는 인간이다. 대지는 더욱이 메말라가고 부해는 그 숨을 더 널리 퍼뜨린다. 인간이 자리할 곳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형국이다. 인간에게 불리하고 불우한 환경에 불합리를 느끼며 이에 저항하려 한다. 그녀는 부해와 곤충들에게 씻을 수 없는 원한을 가졌고, 거신병을 이용해 그것들을 모두 없애는 것이 인류를 위한 길이라 여긴다. 그녀는 인류에게 열악한 환경을 거신병이라는 압도적인 무력으로써 거스르고 전복하려 한다. 같은 인간일지라도 그녀의 길을 막는다면 끝내 부수어버린다. 그래서 그녀의 저항은 어떤 의미로 정복이다. 인간은 자연 앞에 약자이기에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라도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류 문명의 발전은 운명론적 순응이 아닌 정복적인 저항에 의해 태동했다. 인간은 자연을 도구와 정복의 대상으로 삼았기에 전쟁을 일삼았고 환경오염에 무지했다. 영화 속 문명의 붕괴 역시 고도 발전에 따른 환경오염과 자원의 고갈, 그로 인한 전쟁 때문이라고 어림잡아 짐작해볼 수 있다. 또는 상상할 수 있다. 눈먼 노파는 거신병의 재림이 실패하자 이에 안도한다. 거신병의 재림은 과거 문명 붕괴의 재현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는 순응을 멸시한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는 것을 약자로서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으로 여긴다. 주어진 환경에 저항하여 성취할 것을 권한다. 이루고 얻기 위하여 환경을 극복하고 굴복시키고 정복하는 것이다. 이를 사회는 ‘적응’이라 한다. 틀렸다. 이는 적자생존이 아니라 ‘강자존(强子存)이다. 환경에 잘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자가 되어 이로서 또는 이로써 정복하는 것이다. 강자존의 세상은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크사나와 크로메키아의 폭력은 페지테의 복수로, 오무 무리들의 분노로 대응된다. 저항이란 미명 하에 정복과 그 수단인 폭력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분을 산다.

나우시카를 태우고 본국으로 귀환하던 크사나의 함대는 라스텔의 오빠인 아스벨의 기습으로 파괴된다. 나우시카는 추락하는 아스벨을 구하려다 함께 부해의 숲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숲의 지하에는 오래된 거목들이 자리하였다. 오랜 세월 거목들은 조금씩 오염된 토양을 회복하고 이윽고 삭아 부스러져 깨끗한 토양이 된다. 부해는 황폐화되고 오염된 대지를 회복하기 위해 생겨난 것이었고, 오무와 곤충들은 그런 부해의 숲을 지키는 것이었다. 부해와 곤충은 자연의 자가회복이었다. 전쟁으로 인한 문명 붕괴 이후 인간이 삶을 이었듯 자연 역시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부해와 곤충들의 존재 원인을 알게 된 나우시카는 크사나의 계획을 막기 위해 돌아간다.

그러나 자연의 회복 따위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크로메키아는 거신병을 이용해 인류를 통합하고 곤충들을 박멸하려 한다. 페지테인들은 크로메키아에 의해 잃어버린 그들의 나라와 국민들에 대한 복수심뿐이다. 복수심에 눈먼 그들은 어린 오무를 납치하고 유인하여 오무 무리들을 이용해 크로메키아군이 있는 바람계곡을 공격하려 한다. 나우시카가 어린 오무를 구하지만 분노에 눈이 먼 오무 무리들 또한 아랑곳하지 않고 바람계곡으로 향한다. 폭력이 인간의 복수를 낳고 자연의 분노를 산 셈이다. 지난 문명의 이기인 거신병의 공격은 채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끝이 난다. 오랜 문명의 바스러진 우주선에 오른 사람들은 절멸의 위기에 처한다.

이때 나우시카가 홀로 오무 무리를 막아선다. 나우시카는 성난 오무 무리에 받혀 공중으로 튀어 오르다 이내 떨어진다. 나우시카의 죽음을 슬퍼할 틈도 없이 주민들은 죽음에 당면한다. 그때, 붉은 눈의 오무들이 하나둘 진정하더니 모두가 분노를 가라앉는다. 나우시카의 희생이 오무들의 분노를 해소한 것이다. 한 인간의 희생이 기적을 낳았다는 것이 아니다. 당면한 위협과 위기에 한 생명을 희생시키라는 것도 그것이 온당하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시도와 헌신의 문제이다. 나우시카는 희생한 것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헌신한 것이다.

나우시카는 작중의 여타의 사람들과 다르다. 그녀는 크사나는 물론이고, 바람계곡의 주민들과도 다르다. 나우시카는 자연의 부름에 응한다. 호응한다. 나우시카는 곤충을 해하려 하지 않는다. 곤충을 적대시하지 않고 그들을 이해하려 한다. 비행함선에 붙어 떨어진 곤충이 사람들에게 포위당해 두려움에 떨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할 때, 나우시카는 담담히 그 모두들 진정시키고 곤충을 부해의 숲으로 돌려보낸다. 그녀는 자신의 비밀공간에서 부해의 식물들을 키운다. 부해의 식물들이 깨끗한 물을 공급받으면 독기를 내뿜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어린 오무의 상처와 고통에 슬퍼하며 그를 구하려다 다치기도 한다. 그녀는 곤충과 부해, 오무로 대변되는 자연에 감응한다. 라스텔의 죽음에 아파하며 아스벨과 페지테인들의 슬픔과 분노를 이해한다. 그녀 역시 크로메키아군에게 아버지를 잃었지만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데 앞장선다. 나우시카, 그녀는 이렇게 자연과 인간 모두에 상응한다. 인간과 자연에 마주하는 나우시카의 노력과 헌신이 모두의 분노를 해소하고 치유한다.

오무들은 그들의 신경다발로 죽은 나우시카를 들어올린다. 황금빛 물결과 함께 나우시카는 회복한다. 오무들은 되돌아가고, 크사나는 깨우침과 고민을 가진 채 크로메키아군과 함께 본국으로 귀환한다. 바람계곡의 주민들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터를 일구고 숲을 개간하고 오무의 허물을 주우며 삶을 잇는다. 그들은 땅을 파 깨끗한 물을 얻는다. 그들은 환경에 적응할 것이다. 인간과 자연도 상처를 회복하고 새살을 돋울 것이다. 부해의 지하 밑바닥에 피어난 새파란 치코 열매 이파리처럼.

나우시카는 운명론적 순응에 젖어들지 않고 폭력적 수단으로써 저항하지 않는다. 그녀는 자연의 부름에 응한다. 인간과 자연에 호응하고 감응하며 상응한다. 그렇게 그녀는 시도하고 헌신하여 환경에 적응한다. 순응하는 것은 체념하는 것이 아니며, 저항하는 것은 적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시도하고 무엇에 헌신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것에 조응할 것이다.

(2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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