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차설 Dec 22. 2020

인간이 된 괴물, 괴물이 된 인간, <젠틀맨 리그>

영화 감상

괴물. 오늘날 우리에게 ‘괴물’은 익숙하다 못해 친숙한 단어이다. 많은 이야기들과 그것의 작품들로 현대사회에서 소비되기 때문이다. 괴물의 사전적 의미는 괴상하게 생긴 물체를 뜻한다. ‘괴물’은 인간과 다르다. 다르기에 두려움이자 공포의 대상이며, 사람들에게 차별받고 배척당한다. 괴물의 또 다른 의미는 ‘괴상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괴상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하다’이다. ‘괴물’의 두 의미와 ‘괴상하다’의 의미를 통해, 괴물이란 내외형적으로 보통과 달리 괴이하고 이상한 것을 가리키는 말로 볼 수 있다. 오늘날 현대인을 이해하기 위하여 이 괴물에 대해 얘기를 해보고자 한다. 현대사회에서 소비되는 괴물과 오늘날에 인간을 영화 <젠틀맨 리그>를 통해 살펴보자.

<젠틀맨 리그>는 전설적인 늙은 사냥꾼과 여러 괴물들이 함께 거악에 맞서 싸우는 영화이다. 영화는 소설 속 가상의 캐릭터인 흡혈귀, 투명인간, 지킬과 하이드, 도리언 그레이, 네모 선장, 주인공인 영국의 늙은 사냥꾼과 젊은 미 정보국 요원을 등장시킨다. 흡혈귀와 투명인간은 그 이름에서부터 괴물임을 알 수 있다. 지킬과 하이드는 하이드의 경우, 약물로 인해 외적으로는 괴물로 내적으로는 악한으로 변한다. 도리언 그레이의 경우 소설처럼 마법의 그림으로 인해 불로불사를 누린다. 이들은 괴물이다. 반면에 네모 선장의 경우 인간이긴 하나 기술과 과학에 관해 당대를 뛰어넘는 지식을 보인다. 이로 인해 두 번째 의미로서 괴물에 속한다. 영화에서 비춰진 이들은 괴물이나 누구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늙은 사냥꾼과 젊은 요원, 특히 늙은 사냥꾼을 부각시키는 역할로 소모된다. <젠틀맨 리그>는 기존의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주류 집단의 특정 인간상을 확산 및 재생산하는 영화다. 이는 영화의 후반부 두 장면에서 특히 드러난다. 영화는 종장으로 갈수록 괴물들보다는 늙은 사냥꾼과 젊은 요원에 주목한다. 늙은 사냥꾼은 죽음에 이르면서 젊은 요원에게 가르침을 선사하고, 젊은 요원은 이 가르침을 따라 각성하여 악당을 물리친다. 또한 죽은 사냥꾼의 시신을 아프리카 땅에 묻자 이후 사냥꾼이 부활하며 영화는 끝을 맺는다.

영화는 늙은 사냥꾼을 절대 선이자 신화적 이상적 인간으로 승격시킨다. 늙은 사냥꾼은 절대 악과 맞서 싸웠고 젊은 요원을 구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시켰다. 또한 죽기 직전 젊은 요원에게 가르침을 준다. 늙은 사냥꾼의 선은 절대적인 것이며 이는 젊은 요원을 통해 계승되었다. 젊은 요원은 늙은 사냥꾼을 대신해 악당을 저격한다. 평범한 인간인 ‘늙은 사냥꾼-젊은 요원’을 통해, 어떠한 특정 인간상이 만들어진다. 또한 부활하는 늙은 사냥꾼은 이 인간상에 초월적, 신적 성격을 덧씌운다. 서양에서 부활은 예수로 대표된다. 이로써 계승되어야 마땅한 절대 선을 추구하는 인간상에 신성마저 부여되었다. 이러한 인간상은 영화 속에서 긍정적이고 좋은 것으로 여겨지며 시청자에게 투사 및 반영된다.

영화는 악의 세력이 세계를 전쟁으로서 정복하려는 시도를 두 명의 인간과 괴물들이 합세해 저지하는 것을 보여준다. 어떤 특정 집단의 타자에 대한 폭력을 두 명의 인간과 소외 집단인 괴물들이 막은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백인 총잡이인 늙은 사냥꾼과 젊은 요원, 즉 인간에 주목한다. 괴물들은 결투가 끝나고 다시 괴물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들은 괴물이기에 인간 사회에 머무르지 못한다. 돌아갈 곳이 있는 이들은 ‘인간’뿐이다. 늙은 사냥꾼은 아프리카 땅에 돌아가 묻히고 부활한다. 인간은 주연이며 괴물은 조연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는 영화 자체로서 특정 주류 집단이 생각하는 인간상을 확대 및 재생산한다. 영화가 내놓고 추구하는 인간상은 바로 늙은 사냥꾼과 젊은 요원이다. 괴물은 승리를 위해 필요한 소외 집단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에서 절대 악과 절대 선은 서로 갈등하고 대립한다. 그것은 전쟁이며 투쟁이다. 영화에서 절대 선은 승리하고 계승이 이루어지며 존속한다. 그런데 이 절대 선은 영화 외부의 특정 집단의 견해가 반영된 것이다. 이점에서 영화 밖의 현실에서도 투쟁이 존재한다.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에서 ‘경쟁’으로 불린다. 영화 속이 아닌 현실에서, 영화를 통해 스스로를 절대 선으로 주장하던 집단은 강력한 힘을 가진 주류 집단으로서 기능한다. 이들에게 외집단은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일시적 동맹을 맺거나 적으로 싸워 무찔러야 할 존재들이다. 이들에게 외집단은 승리의 지속을 위해 필요한 부품이자, 잠재적 또는 실질적 적이다.

특정 집단의 일만이 아니다. 모든 집단과 집단의 일이며, 이는 앞서 말했다시피 개인의 경우에 더욱더 극적이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 상황이다. 가장 작은 집단인 개인에게 최우선 순위는 자신이다.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이다. 그렇기에 자신이 옳고 남은 그르다. 이로써 인간은 자신에게 더욱 동화하고 타인을 더욱 분리시킨다. 자신의 생존과 보다 나은 안위를 위하여 타인을 배제하고 배척한다. 자신의 이익을 확대 및 재생산하기 위하여, 타인의 것을 억압하고 갈취하며 강탈한다. 인간은 개별 인간에게 늑대인간과 같은 괴물이 된다. 모든 인간은 모든 인간에게 갖가지 괴물인 셈이다.

오늘날 이러한 인간성은 인간이 인간에게 늑대인 문명의 야만에서 가장 신봉되는 인간상이다. 이러한 인간성을 지닌 자들이 경제적으로 부를 걸머지고 성공하여 신화적 이상적 인간상으로 거듭난 것이 오늘날의 사회이다. 이러한 인간성과 인간상은 문화를 통해 심화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영락을 위해 괴물로 전락한 것인가? 인간은 그 의미를 상실한바 인간이 아닌 ‘괴물’이다. 다만 ‘인간’으로 불릴 뿐이다. 이 역설에 따라 인간을 이해하려면 우리는 괴물이 되어야 한다. 괴물은 괴물이 된 인간의 의미와 성질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존재이다. 괴물은 인간의 유의미한 또 다른 이름이다. 외눈박이 나라에서 두눈박이는 괴물이다.


(17.6.30)

매거진의 이전글 <강철비 2 : 정상회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