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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Jan 29. 2021

스위트 홈이란 무엇인가?, <스위트 홈>

<드라마 감상> 스위트 홈 연작 1. 현수


 언제나 재난은 예견치 못한 상황에서 급작스레 찾아온다. 어떠한 방비도 못한 채 위기를 맞고 위험을 겪고 위협에 처한다. 때로 이러한 재난은 한 사람의 삶뿐만 아니라 모두의 삶을 바꾸기도 한다. 드라마 <스위트 홈>은 전국적인 재난 속 그린홈에 발이 묶인 입주민들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정다운 집, 스위트 홈이 의미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이 극의 주인공인 현수의 이야기를 통해 얘기해본다.

 그린홈은 재개발로 인해 철거 예정인 낡은 아파트이다. 이 아파트의 주변은 한창 재개발 중이고 위태롭게 서 있는 그린홈에는 사회로부터 밀려나 어딘가에서 흘러들어온 이들이 자리한다. 이곳에서도 사람들은 천연덕스럽게 또는 상냥하게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썩은 생선에 담긴 호의에 누군들 모멸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의 차이가 차별을 낳는 이곳 그린홈은 소소한 무례와 적잖은 모욕이 난무하는 남루한 낭떠러지이자 사회의 축소판이다.

 몇 안 되는 짐을 안고 현수는 그린홈에 온다. 연이은 불상사로 인해 부모와 누이를 잃은 소년은 세상과 단절한 채 죽을 날을 세고 있었다. 현수는 타인의 호의에 냉랭히 대한다. 그는 타인을 믿지 않는다. 현수의 섣부른 호의는 이유 없는 폭력으로 되돌아왔고 그의 저항은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족들마저도 그를 외면하였다. 모두에게 떠밀린 현수는 스스로 손목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애석하게도 가족 간 유대 회복은 사고로 인해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는 학교와 가정에서 내몰리고 친구와 가족에 내쫓겨 떠밀리듯이 그린홈에 발을 들인다.

 소년의 세계는 무너져 내렸다. 그가 자신의 세상 속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고 외면당했을 때, 소년 현수는 끝없는 절망에 좌절했고 세상과 삶으로부터 단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너진 소년은 과거에 메여 현실과 미래를 단념한다. 현수는 방구석에서 죽을 날과 결심만 되뇌며 게임에 몰두한 채 지낸다. 그는 삶을 바라지 않는다. 그의 모든 바람이 부정되었기에 그의 비틀린 바람은 죽음이며 죽음은 그에게 탈출구이다.

 그러던 어느 날 돌연 사람들이 하나둘 괴물이 되어버린다. 괴물은 사람을 거리낌 없이 해치고 이에 많은 사람이 죽는다. 현수는 죽음의 공포를 느끼지만 얼마 안가 자신이 변해버린 저 괴물들처럼 되어가고 있는 것을 알아챈다. 그는 예정일을 앞당겨 조금이라도 사람의 모습으로 죽으려 했다. 그렇게 창문을 열었을 때 별안간 위에서 어린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리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줄에 몸을 매달고 내려가는 것을 본다. 그러다 괴물의 공격으로 추락사한다. 겁에 질린 아이들을 보고 현수는 마음을 먹는다. 저 아이들을 구하겠다고. 현수의 불행은 그의 선의에서 비롯됐지만 그러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시 선의를 품고 타인을 위해 행동하기로 다짐한다. 그는 무지막지한 폭력에 거리낌 없이 스스로를 내던진다.

 우여곡절 끝에 현수는 괴물화가 되어가는 몸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무사히 생존자 무리에 합류한다. 생존자들은 현수가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며 그를 경계하고 가두기에 이른다. 그러면서도 현수의 이용가치 때문에 재차 그를 위험한 곳으로 떠밀어낸다. 이곳에서도 현수의 선의는 부정되었고 외면당했으며 이용될 뿐이었다. 현수는 또다시 소외되었다. 그러나 사회로부터 떠밀려왔으면서도, 작은 차이로 큰 차별을 만드는 위계와 폭력이 일상화된 이 퇴적지에서도 몇몇은 달랐다. 그들은 현수를 받아들였고 품어주었다. 현수와 함께 괴물들과 싸워온 동료들이 그러했다. 괴물화가 진행되며 현수의 고통을 이해한 선영이 그러했다. 어른으로서 현수를 위로해준 길섭과 동식이 그러했다. 자신들을 구해준 현수에게 의지하는 두 아이들이 그러했다. 어느덧 죽음을 바랐던 현수의 바람은 이들을 지키는 것이 되었다.

 현수에게는 어쩌면 돌아갈 곳이 필요했던 것이지 않을까? 학교 폭력을 당했을 때도, 가족에게 외면받았을 때도, 스스로 손목을 그을 때도, 사고로 가족을 잃었을 때도. 현수는 매 순간마다 그를 받아주고 위로해줄 사람들을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들의 부재로 그는 무너져버렸다. 사회와 관계로부터 소외받고 그린홈으로 떠밀려온 소년은 삶에 체념한 체 안식만을 바랐었다. 그러나 소년은 진정으로 죽음이 아닌 삶을 바랐을 것이다. 그의 팔 가득히 남은 흉터가 이를 보여준다. 사투마다 괴물이 될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생으로 돌아온 그의 행적이 이를 보여준다. 사람이 괴물이 되는 것은 욕망이 발현되는 것이다. 괴물이 되면 정신은 죽어 안식을 맞지만 육체는 괴물로 변하여 사람을 해친다. 그러나 소년은 죽음과 폭력, 괴물에 맞서 사람들을 지켰고 안식을 거부하며 생을 이어나갔다. 그가 바라던 자신을 포용해주고 포옹해주는 사람들이 그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수의 바람은 죽음의 안식이 아닌 함께 하는 삶이었다.

 이처럼 정다운 고향, 그리운 집, 스위트 홈은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다. 스위트 홈은 유대와 연대로 비롯된 정서적 공간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관계이다. 한 사람이 부조리에 무너져 내렸을 때 그가 다시 일어서 그들의 품으로 돌아오기까지 그의 곁에서 위로해주고 기도해주고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들이 서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스위트 홈이다. 현수가 바라던 이들이 이 낭떠러지 그린홈에 있기에 그는 돌아왔었고 앞으로도 돌아올 것이다.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거라 여겼던 정겨운 사람들과 그리운 그들의 품, 스위트홈으로.


(21.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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