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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Jan 30. 2021

'신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으로', <스위트 홈>

<드라마 감상> 스위트 홈 연작 2. 재헌


 1997년 개봉한 영화 <콘택트>에서 이런 얘기가 나온다. ‘인류의 90% 이상이 신의 존재를 믿는다.’ 이 얘기를 들으며 인류의 대다수가 신의 존재를 믿는다면 신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반문(反問)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도 반문(盤問)하고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을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사람, 다소 겸연쩍고 서먹하더라도 상대가 불편하지 않게 배려하는 사람, 아픈 이가 손가락질받지 않도록 오해를 막고 상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 황금 같은 주말에 정장을 가지런히 입고 부지런히도 교회에 나갈 수 있는 사람.(웃음) 정재헌은 그린빌에서 가장 비인간적이면서 그렇기에 인간적이다.

 뜻하지 않은 재해 속에서 재헌은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재난에 대응한다. 선두에 서서 괴물들과 맞서 싸우며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준다. 생존자들이 현수를 두려워하고 경계할 때 그것을 만류하며 현수를 인간으로 대한다. 또한 상욱의 사연을 알고 그가 생존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아이들과 동료들을 구하기 위해 괴물을 유인하고 기지를 발휘해 아파트 밖으로 괴물을 몰아내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그는 그 누구보다 성실히 타인을 지키기 위해 괴물과 맞서 싸웠고, 그렇기에 그는 괴물을 끌어안고 함께 타 죽는다.
 
 그런데 재헌은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재난 전 재헌은 일개 국어교사였다. 오랫동안 검도를 수행했으며, 주말이면 교회에 나가는 신자였다. 그는 평범한 남성에 불과했다, 남다른 점이라 하면 유달리 이웃에 상냥한. 그런 그가 재난 속에 약자를 보호하고 이방인에게 관용을 베풀며 무리의 생존과 안녕을 위해 누구보다 더 앞장서서 힘써 이바지한다. 그럴 필요가 없음에도 말이다. 재난이 벌어지자 사람들은 제 한 목숨 구하고자 도망치기에 바빴다. 그들은 누군가 자신들을 보호해주고 구해주기만을 바랐다. 그들은 당면한 위험에 무작위 했고 타인 또는 약자, 설혹 서로에게도 무자비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에만 급급하였다.

 재헌, 그는 행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현수처럼 괴물로 변이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지 않았다. 그는 상욱처럼 범죄자로서 주변으로부터 공포와 두려움을 일으키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소방대원인 이경처럼 국민의 안전을 보호해야 할 의무도 지니지 않았다. 오히려 이경은 남편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 아파트를 떠난다. 그에게는 어떠한 의무도 없었다. 그 역시 자신의 생존에만 책임지면 되었다. 그 또한 다른 주민들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 뒤로 물러서고, 도망가고, 행동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는 비겁해도 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 누구보다 더 헌신적으로 임했고 끝에 죽음을 맞았다. 그는 숭고한 이였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한 사랑은 없나니 너희가 주 행하는 대로 행하면 곧 주의 친구라.’ 그는 신실한 사람이기도 하다. 한때 그는 알코올 중독자였었다. 그가 고난과 역경에 좌절했을 때 그는 기도와 신앙을 통해 이를 극복했었다. 그 후로 그는 신의 종복이 되어 신의 말씀을 따라 살았고 행해왔다. 그런 그도 재난을 겪으며 사람들을 하나둘 잃고 지수마저 병상에 누워 있자 “주님께서는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주시지 않는다고 배웠습니다. 근데 인간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소설 <페스트>에서 페스트를 하늘의 징벌이라 여기며 사람들의 죄와 부도덕을 꾸짖으며 회개할 것을 강론하던 파늘루 신부는 오통의 어린 아들, 세상 무고하고 순결한 어린아이의 고통과 죽음에 절망한다. 이 어린아이가 무엇을 잘못하여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을 받아야 하는 것인가? 재헌 역시 신의 뜻이 도대체 무엇이기에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련에 놓인 것인지 자조하고 신이 인간을 과대평가하는 것 아니냐 묻는다.

 그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괴물에게 나아가 싸우기 전, 그러니깐 죽기 전에, 병상에 누워 있는 지수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지수는 이 역시 신의 뜻이냐고 묻는다. 그러자 그는 신의 뜻이 아닌 자신의 뜻이라고 대답한다. 그는 이미 부상을 입어 오른팔을 못 쓰는 상태였고, 한 팔로 괴물과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싸워 지키기는커녕 싸우다 죽을 위험이 더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앞장서 나아가 지키다 죽는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단지 신의 뜻이기에? 어쩌면 재헌에게 신의 뜻은 어떤 삶의 지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재헌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 그 이유와 당위로 ‘신의 뜻’이라 말하곤 했지만, 그것은 신의 뜻이 아닌 인간 정재헌의 뜻이었다. 곧 그의 곧은 의지였다. 재헌이 지수를 사랑한 것이 그 자신의 뜻이었듯 타인의 생명과 안위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한 것은 그의 뜻이자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이었다.

 지구 상의 대다수의 인류가 어떤 식으로든 신의 존재를 믿고 따른다지만 어떠한가? 오늘날 전쟁의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종교이다. 제 종교만이 진리라 여기며 싸움을 일삼고 그 종교 내에서도 이권을 두고 드잡이를 하는 것이 현실이다. 신의 말씀, 율법, 계율,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 오늘날 사회에서 도덕과 윤리, 선에 대해서 사람들은 무관심하다. 마치 그린홈의 주민들이 서로에게 또는 선에 대해 무관심하며 무작위 하며 무자비하듯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신’, ‘성’이란 좁은 틀을 씌우고 그 ‘좁은 문’을 넘어가는 것에 주저한다. 이 반열에 오른 이들을 신적 존재나 성인으로 치켜세울 뿐 좇지 않는다.

 그렇다면 정재헌은 신적 존재이거나 성인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일개 인간에 불과하다. 단지 그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선을 제 스스로의 의지로 행했을 뿐이다. 그는 선을 실현하기 어려운 다른 차원의 것이라 여기지 않았다. 그는 몸소 제 스스로의 뜻으로 선을 실천하였다. 선은 신의 뜻도 고차원적인 것도 아니다. 단지 우리 스스로 좁은 문이라 여기며 유리천장으로 삼을 뿐이다. 선의 실천이 어려운가? 작은 것부터 시작하자. 가령 재헌처럼 이웃에게 상냥해지기. 선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런고로 정재헌은 그린홈에서 그 누구보다 비인간적이면서도 그 누구보다 더 인간적이다.


(2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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