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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Feb 04. 2021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스위트 홈>

<드라마 감상> 스위트홈 연작 3. 상욱.


여기 한 소년이 있다. 소년은 한 사내를 죽인다. 사내는 소년의 집에 불을 질렀고 소년의 아버지는 화재로 사망하였으며 소년은 전신에 화상을 입었다. 사내는 불과 11개월 형을 살고 출소한다. 소년은 묻는다, 범죄의 이유를. “장난.” 답에 소년이 분개하자 사내는 지은 죄에 대한 벌을 이미 받았다고 한다. 그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소년은 살인을 저질렀다. 이유 없는 폭력에 한 소년의 삶이 단숨에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소년의 이름은 상욱이다.

 
상욱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어느 날 무책임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법은 살인범을 제대로 징치하지 않았다. 법의 징치는 추상(秋霜)과 같아야 할진대 정의는 실현되지 못했다. 상욱은 법으로부터 보상받지 못했다. 이로써 상욱은 스스로 징벌을 내렸다. 법은 자력구제를 용납지 않는다. 더구나 살인이라니. 법 앞에 상욱은 살인자에 불과했다. 더 이상 그는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고 그는 법으로부터 구제받지 못했다. 무엇이 그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이후 상욱의 삶이 어떠했을지 짐작할 수 없다. 다만 그는 비인외도(非人外道)를 걸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었으니깐. 그는 일용직을 전전하는 청부업자가 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떠밀리듯 그린빌에 닿을 때, 상욱은 어떤 목적을 갖고 그린빌을 찾는다. 그의 목적은 유아 납치, 폭행, 살인이 의심되나 법망을 피해 간 이를 상대로 납치당한 소녀를 되찾는 것이었다. 상욱은 저처럼 법의 보호와 도움을 받지 못한 소녀 아버지의 부탁을 받았다. 상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단서를 찾아 범죄를 증명한다. 그러나 이미 아이도, 아이의 아버지도 죽고 난 마당이었다. 상욱은 범죄자를 죽음으로써 단죄한다. 법이 범죄자를 의사봉을 내리쳐 심판하지 않자 그가 망치로 내리쳐 결판한다. 법이 구원하지 못한 두 부녀를 상욱이 대신 구원한 것일까? 다만 그들의 원구(怨咎)하는 마음만큼은 풀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또다시 살인을 저지른 그는 누구에게 구원받을 것인가?

 
법은 상욱과 두 부녀에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으나 재난 이후로 제 구실을 못한다. 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상욱의 살인을 목격한 사람들은 상욱의 거취를 놓고 왈가왈부한다. 이때 진옥은 모두가 외면하고 방치한 딸의 시신을 상욱이 아파트 안으로 가져다준 것에 감사해한다. 상욱은 진옥이 주는 금붙이를 마다하고 급조한 묘지에 간다. 그는 땅을 파 불을 피우고 아이의 유품과 사진, 그리고 아이의 아버지에게 받은 7,800원을 태운다. 재헌이 나타나 상욱에게 말한다. “당신이 옳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그래도 고생하셨습니다.” 상욱은 재헌에게 기도해줄 것을 청한다. “신은 나보다 널 더 좋아할 테니깐.” 상욱은 사회의 법으로부터 구원받지 못했고, 신으로부터도 구원받지 못했기에 기도를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인간의 법과 도덕의 근간을 이루는 사람의 마음이 남아 있었다.

 
재헌은 상욱과 그의 방식이 옳다고 여기진 않았지만 그를 인정하였고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에게 다른 방식으로 삶의 부조리와 맞서 싸워보길 권한다. 재헌은 상욱에게 식량을 관리하는 일을 부탁한다. 은혁은 사람을 죽이는 일만 해온 상욱에게 사람을 살리는 일에 힘써보라 한다. 상욱은 괴물과 범죄자로부터 공격을 받아 부상을 입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떤 치료도 하지 않는다. 유리는 삶에 의미를 두지 않은 상욱에게 일갈한다. “이런 세상이니깐 살아남았으니깐 더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겁니다.” 이에 상욱은 거부하던 치료를 유리에게 맡긴다. 상욱은 생존자 그룹의 일원으로서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동료들과 함께 사람답게 살고자 노력한다.

 
재난으로 인해 사회의 법이 무너지고 괴물들이 사람을 해치며 구호도 구원도 요원해졌을 때 비로소 상욱에게 구원의 기회가 찾아온다. 드디어 그는 사람들과 함께 사람답게 살아볼 삶을 되찾은 것이다. 그는 인간성을 상실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애당초 그린빌에 발을 들인 목적은 살인이 아닌 아이를 찾는 것이었다. 그는 모두가 외면한 진옥의 딸과 군인의 시체를 아파트 안으로 옮겼다. 그 역시 나름에 인간성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사회의 법도, 신의 말씀도, 인간의 마음도 그를 구원하지 않았기에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 수 없었다. 그러나 정부의 구호도 신의 구원도 부재한 이 재난 속에서 사람들은 상욱을 그 자체로 목도하였고 이로써 그를 인정할 수 있었고 인정(人情)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진다.

 
상욱은 생존자들을 지키는 데 분투한다. 그러던 중 천식을 앓던 유리의 약이 떨어지고 죽어가는 유리를 업고 약을 구하러 가다가 죽음을 맞는다. 상욱은 죽어가면서 지수를 구하느라 범죄자를 죽인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유리에게 말한다. “네가 죽인 것은 사람이 아니었어.”, “생각하지 마.”, “떠올리지 마.” 유리는 답하고 숨을 거둔다. “아저씨도요.”

 
사람 인(人) 자는 사람이 사람과 기댄 형상이라고 한다. 인간이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 더불어 사는 사이이다. 인간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 구원은 인류를 죽음과 고통과 제악에서 건져 내는 일이라고 한다. 언뜻 요원하다. 그러나 구원은 멀지 않다. 구원의 또 다른 의미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처한 사람을 구하여 주는 것이다. 상욱은 구원받았는가? 그렇다. 그는 사람으로서 사람을 구원하였고 사람에게 구원받았다.


(21.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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