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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Dec 01. 2021

21.12.1 아케인 연작 3. 필트오버와 지하

전쟁은 불가피했는가?

한 덩이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국가들의 전쟁은 계속되었고 바라는 평화는 찾아오지 않았다. 압도적인 무력을 갖추지도, 초극적인 신념을 공유하지도 않았기에, 그 어느 누구도 전쟁이란 이름의 평화를 제 것으로 하지 못했다. 오직 평화를 위한 전쟁이 지속될 뿐이었다. 야욕과 그로 인한 파멸을 피하여 많은 이들이 피안을 찾아 떠났다. 바다를 두른 높은 지대에 사람들은 모여 땅을 일구고 건물을 쌓아 올렸다. 오직 인간을 위한 번영과 발전을 천명하며 문명의 진보를 표방하는 도시를 건설한다. 주변의 강대국들에 비해 볼품없는 무력을 가진 도시 국가에 불과했지만, 이들이 이룩한 문명의 기술과 발전은 상당한 것이었고, 기술적 우위에 따른 이들의 저력은 가벼이 여길 것이 아니었다.


도시는 과열된 증기기관처럼 연신 열을 올리며 발전을 거듭하였고, 무분별한 발전은 불확실한 위험을 내포한 채 계속되었기에 위험 또한 거듭 증식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의문의 사고, 또는 재해로 도시의 상당부가 지진으로 무너져 내려 가라앉고 만다. 그간 발전에 활약한 숱한 공업시설들은 파괴되어 중금속 및 화학물질들이 땅 밑으로 쏟아져 내렸다. 가라앉지 않은 이들은 오염을 피하기 위해 더 높이 건물을 쌓아 올렸고, 매몰된 터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패하고 파괴된 잔해더미에서 삶을 연명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지하는 지반의 침하와 오염이 계속되고 상층 도시는 건축과 발전이 계속되자, 이들은 같은 배에 태어난 자식들이지만 왕자와 거지가 되고 말았다.


한때 이들을 모두 아울러 ‘필트오버’라고 불렀지만, 부유한 상층부의 도시민들은 자신들의 마천루만을 ‘필트오버’로 여기기 시작하였다. 필트오버의 시민들은 도시 밑에 사람들을 지하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지하는 외면하고 싶은 잔재이자 골칫덩이에 불과했다. 지하는 통제되지 않은 사고였고 통제할 수 없는 폐해였다. 지진의 피해를 극복하고 필트오버는 영광과 위명을 나날이 쌓아갔지만, 그 영광의 산물은 오직 ‘필트오버’ 시민들의 것이었고, 지하로 떨어지는 것은 오염물질과 폐기물들이었다. 필트오버의 외면으로 빈곤과 굶주림에 놓인 지하의 사람들은 뜻을 모아 집단을 이루어 다리를 건넜다. 그러나 그들에게 되돌아온 것은 형제의 따듯한 도움의 손길이 아닌 무차별적 폭력이었다. 필트오버는 그렇게 상층부의 진짜배기 필트오버 시민들과 하층부의 지하 사람들로 나뉘었다. 공간의 물리적 단절로 생성된 지층의 수직적 위계는 계층과 계급의 수직적 위계로 변하였다. 1등 시민인 필트오버인들은 부와 권력을 독차지하였고, 2등 시민인 지하의 사람들은 하루를 살아남기 위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게 되었다.


필트오버는 기술의 발전으로 획득한 부를 기반으로 특정 가문들과, 기술의 발전을 태동하고 추동하는 지식인들이 협력하여 통치체인 의회를 구성한다. 의회의 구성원들은 대개 부유한 가문의 일원들인데, 이들은 만장일치제를 표방하지만 의원들의 이해만이 표결되는 참주정이라 할 수 있다. 의원들은 발전의 영광에 눈이 멀어 그들의 위치에서 권세와 이익을 누릴 뿐이다. 타성에 젖어 중차대한 문제를 도외시하고 있다. 제이스와 빅토르의 마법 공학 연구가 성공하고 현실에 적용되어 상업화되자, 필트오버의 부는 더욱더 막대해진다. 무능한 의원들과 사업가들은 영욕에 눈이 멀어 관성을 따라 부를 더욱더 증대시키기에 급급할 뿐 잠재한 위험에는 일절 무관심하다. 그리고 문제는 결국 제 뿔을 드러내며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간 물 밑에서, 정확히는 지하에서는 커다란 변화가 생겨났다. 과거 다리에서의 학살 후, 지하는 사분오열되어 삶을 유지하기에도 급급했다. 지하는 필트오버와 물리적, 정석적으로는 단절되었지만 정치경제적으로 예속되어 있었다. 설사 떨어진 것이 콩고물 아닌 중금속과 화학물질에 오염된 폐자재일지라도. 지하에는 그들을 대표하는 통치체가 없었고, 실력자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구역으로 갈라져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하의 대표적인 그룹 중 하나가 밴더가 이끄는 ‘레인즈’였고, 밴더의 보호 아래 레인즈의 사람들은 최소한의 치안을 보장받고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또 하나의 그룹은 실코의 패거리들이었다. 밴더의 레인즈와 실코의 패거리들은 그 성격이 달랐다. 레인즈는 지하의 안정과 평화를 강조하며 서로 간에 협력을 통해 서로의 안전과 생계를 보장 및 보호하는 마을공동체에 가까웠다. 이들은 필요에 의해서라면 필트오버와도 협력을 구하였다. 실코의 패거리들은 지하의 평화 안정을 보장받기 위해서는 필트오버로부터 힘의 균형을 갖추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집단이었다. 이들은 더 나아가 힘의 균형을 통해 필트오버로부터 분리독립을 꾀하였다. 그것이 필트오버의 간섭과 박해로부터 벗어나 지하를 구제하는 진정한 길이라고 여겼다. 두 집단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결과는 예상보다 싱거웠다. 실코의 함정과 기습에 밴더와 협력관계인 밴조, 필트오버의 보안관인 그레이슨, 끝으로 밴더마저 제거되면서, 지하는 실코의 주도 하에 빠르게 변모한다. 그들은 화학약품인 시머의 생산과 공급을 통해 지하에서 무력과 자본을 갖추고 지하를 차지한다.


필트오버에 분리 독립을 추구하며 적대적 관계를 가진 실코와 그 휘하는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폭력적인 수단도 서슴지 않는다. 필트오버의 치안은 불안해지고 무능한 의원들은 이에 대한 적극적이고 뾰족한 대책을 내지 못한다. 이때 마법 공학의 제창자인 제이스가 의원으로 선출되며 급기야 의장격인 하이머딩거를 몰아내고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위치에 오른다. 하이머딩거는 통제되지 않은 요소들에 대해 불안해하며 그간에 산적한 문제들을 외면해왔다. 하이머딩거는 오랜 세월 전쟁의 참혹한 결과를 보았기에 전쟁이 발발할만한 갈등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지하에서의 범죄와 힘의 집중이 일어남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대책도 취하지 않고 방임하였다. 제이스는 경제제재와 검문 강화를 통한 고립정책으로 내세우지만 실패하고 만다. 제이스는 마법 공학은 오직 인간의 번영과 평화를 위하여 쓰여야 한다는 자신의 신념에 어긋나더라도 도시의 치안을 지키고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법 공학을 무기화하여 힘의 우위를 다시 차지하려 한다. 결국 제작한 마법 공학 무기를 바탕으로 섬멸 기습전을 벌여 실코의 시머 생산공장을 무너뜨리게 이른다.


실코는 오랜 세월 지하에서 생활하며 필트오버와 지하의 구조적 모순과, 필트오버의 외면과 박해를 몸소 겪어왔다. 그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힘을 길러 필트오버와 힘의 균형을 이루는 것만이 지하가 수모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이에 어느 화학자와의 협업을 통해 ‘시머’라는 화학약품을 개발하는데, 이는 중독 및 유독성이 있는 물질이지만, 사용자의 신체를 강화하는 약물로, 필트오버에 대한 비대칭 전력으로서 막강한 군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구축한 힘의 균형이 제이스의 마법 공학에 의해 필트오버 쪽으로 추가 기울여 하자, 실코는 징크스를 통해 테러로 마법공학 기술을 훔쳐내 마법 공학 무기 개발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무기 개발 이전에 제이스의 기습으로 힘의 한 축이었던 시머 생산기지를 빼앗긴다.


두 세력의 갈등과 두 지도자의 대립으로 전쟁 발발 가능성은 증대되지만, 시머 생산기지 습격 간 자행된 폭력과 학살로 전쟁의 참혹함에 두려움을 느낀 제이스는 유화정책의 일환으로 실코와 협상을 한다. 실코의 조건은 자주권과 정치범에 대한 사면, 경제에서의 자유였다. 제이스는 그 대가로 비대칭 전력인 시머 생산과 마법 공학 원석의 반환을 제시한다. 그리고 테러범인 징크스의 송환을 요청한다. 제이스는 징크스에게 죄의 대가를 지움으로써 필트오버 도시민들의 복수심을 대리하려 한다. 이 협상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제이스와 실코는 각자가 원했던 평화와 자주를 얻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협상은 자의 반 타의 반 결렬되고 만다. 제이스가 필트오버의 모두를 위해 마법 공학을 무기화하지 않겠단 자신의 신념을 꺾을 수 있었다면, 실코는 징크스 한 사람을 위해 지하의 모두를 위한 지하의 독립 및 자운의 건국이란 신념을 꺾는다. 그것은 제이스가 실코보다 뛰어난 대표자라고도 할 수 있지만, 실코의 개인적 성격을 보다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실코는 말하였다. 개뿔도 없던 지하에서 오늘날까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형제, 자매들과 무슨 일이 닥치든 함께 싸웠기 때문이었다고. 의리. 그동안에 실코가 지하 내 경쟁세력과 필트오버와 대립하며 힘을 갖추고 이 자리에 이른 것은 이 핵심가치 덕분이었다. 그리고 징크스는 실코가 가장 신뢰하고 총애하는 대상이었다. 제이스는 이를 간과한 것이었다. 제이스는 실코를 냉철한 범죄조직의 수장이자 야심가로 여겼지만, 실코 그가 여태껏 지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뜨거운 의리 덕분이었다.


제이스는 의회에서 지하의 독립에 대한 회의를 진행하며 만장일치를 이끌어낸다. 이로써 실코와의 협상에서 더 큰 협상력을 차지할 것이었다. 그러나 실코는 보다 더 뜨거운 사람이었고,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의 징크스에 의해 상황은 파국 일변도로 몰아닥치며 예정된 전쟁이 다가온다. 필트오버와 지하의 분쟁,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었을까? 그렇다고 본다. 이들의 갈등을 중재할 강대한 세력이 부재하였고, 이들은 오랜 세월 구조적 모순으로 인한 갈등을 겪어왔고, 다른 통치조직을 갖고 있었으며 이 두 통치체 모두 참주정, 또는 독재정으로 소수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또한 제이스와 실코, 두 지도자는 협상을 이루지 못했고 이 둘의 경험과 성격의 차이는 결과적으로 전쟁을 야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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