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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Dec 20. 2021

21.12.20. 그린나이트

기사도 없는 기사의 무용한 무용담

 과거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이 그들만의 전설과 모험을 쌓아올린 성전에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연회가 열렸다. 연회에 초대된 가웨인은 일상을 술과 유흥으로 보내는 한량이지만 언젠가는 자신만의 무용담을 이루어 아서왕과 원탁의 기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길 내심 바라마지 않았다. 왕은 조카인 가웨인을 말석에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그간에 무심함을 뉘우치며 가웨인에게 이야기를 청한다. 그러나 무명소졸인 가웨인은 왕에게 들려줄 마땅한 이야기가 없었고 그것이 자못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성문을 지나 성전으로 들어선다. 무장한 채 들어온 기사는 왕에 대한 부복없이 무례하게 제 자신의 뜻을 드러낸다. 나무얼굴을 한 녹색기사는 왕비의 입을 빌려 크리스마스 게임에 참가할 것을 권한다. ‘되갚음’에 관한 이 게임은 녹색기사의 목을 취하는 자에게는 그의 도끼가 주어질 것이고 무한한 영광과 능력이 주어질 테지만, 1년 후 녹색예배당으로 찾아와 그 대가를 치르는 것이었다. 목에는 목, 숨에는 숨으로.


 아서왕은 이 녹색기사의 무례와 모욕에 제 자신이 원탁을 넘어 녹색기사와 결투하길 바라나, 노쇠한 몸으로 그럴 순 없기에 연회에 참여한 기사들에게 녹색기사와 싸울 것을 고한다. 그러나 녹색기사의 허무맹랑한 소리와 아서왕의 부름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은 가만히 앉아만 있을 뿐 어느 하나 나서지 않는다. 이때 자신을 증명하길 고대하던 가웨인이 원탁을 넘어 녹색기사와 마주한다. 왕은 선뜻 자신의 검을 빌려주었고 가웨인은 왕의 검으로 녹색기사와 대치한다. 그런데 결투를 하자던 녹색기사는 무기를 들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서 가웨인을 지켜볼 뿐이었다. 가웨인은 녹색기사가 자신을 욕보인다고 여기고 분하게 여겨 녹색기사의 목을 벤다.


 이로써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웨인의 이야기는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근 일 년을 가웨인은 조악한 위명 속에서 방탕한 생활을 연이어 온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쯤 가웨인은 왕의 엄포에 녹색 기사를 찾으러 떠난다. 가웨인의 어머니는 가웨인에게 어떠한 위해로부터도 몸을 지켜주는 녹색 허리띠를 준다. 종자 하나 없이 가웨인은 모험길에 오른다. 그리고 이쯤에서 여러분도 짐작하다시피 가웨인의 모험이란 우스꽝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가웨인은 기사를 꿈꾸며 무용담을 쌓길 바랐으나 그에 관한 어떠한 노력도 준비도 되지 않았다. 그는 왕의 조카라는 신분으로 성에서 안락한 삶을 누렸고, 굳이 만용을 부려 녹색기사의 목을 베어 모험에 떠밀렸다. 모험은 가웨인이라는 인물에 대해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가웨인은 소년의 호의에 고마워하지 않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아 강도를 맞는 위험을 자초했고, 목이 잘린 혼령의 호소에 도움의 대가를 먼저 요구하였다. 거인들에게 도움을 청하나 두려워 물러섰다. 성주의 아내의 유혹에 휘둘렸다. 성주의 아내로부터 녹색허리띠를 빼앗은 가웨인은 성안에서 얻은 물건과 성주가 구한 물건을 바꾸기로 한 약속을 어긴다. 그리고 기껏 찾아간 녹색기사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도망치고 만다. 가웨인은 기사를 꿈꾸었지만 기사도를 따르지 않았고, 무용담을 쌓길 바랐지만 무용을 갖추지 못했다. 그저 허명과 영예를 좇을 뿐이었다.


 달아난 가웨인은 왕에게 도망친 사실을 숨겨 거짓된 영광을 누리고 왕위에 오른다. 신분에 맞지 않은 연인에게 자식을 얻자 자식을 빼앗고 자신은 이웃나라의 공주와 결혼한다. 가웨인은 무수한 정복전쟁을 벌이고 군주로서 성세를 누린다. 그러나 잦은 전란으로 인해 아들을 잃고 전란은 끝없이 반복되어 결국 자신의 궁궐 안으로 적군이 밀려들어온다. 홀로 남은 가웨인은 두르고 있던 녹색 허리띠를 풀고 그러자 머리가 떨어진다. 가웨인은 눈을 뜬다. 미몽에서 깨어나고 깨우친 가웨인은 목을 빼어 녹색 기사에게 준비가 되었음을 알리고 도끼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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