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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Mar 17. 2023

시 읽기와 오독에 관하여

독서에 관한 단상


 기실 보건데 내가 시를 읽는 모양새란 어떤 요령이나 요량 따위 없이 그저 보고 또 보고 계속 보는 것이다. 본격적으로 시를 읽은 지 십여 년이 되어가지만 여태까지 외운 시라곤 남이 장군의 시 스물여덟 자(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가 전부다. 이 또한 미성년에 외운 셈이니 실로 성년 이후 외운 시는 여태 전무한 셈이다. 시 읽기를 즐겨 하는 이들은 더러 시를 외워 낭독하기도 한다는데 참 여러모로 별나다. 수백 권의 시집을 읽었으나 하나의 시조차 외우질 못한다.


 이는 그간 내 읽기의 내력 탓일 테다. 나는 앞서 말했다시피 시를 외우질 않는다. 시를 소리 내어 읽지도 않는다. 그저 눈으로 보고 속으로 읽는다. 하나의 시를 반복해서 읽기 보단 한 권의 시집을 통틀어 읽는다. 왜 그러냐 하면, 보통 시는 수십여 편의 시를 묶어 하나의 시집으로 간행된다. 이러한 시들은 짓고 만든 이의 의도에 따라 특정한 순서로 배열되어 있는 것이다. 한 편의 시가 지은이의 의도에 따라 단어와 문장이 만들어지고, 개개의 행과 연에 위치하듯이 말이다. 한 권의 시집은 수십 편의 시가 저마다 행과 연으로서 나열된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 편의 시를 완전히 이해하려는데 몰두하지 않는다. 행과 연, 시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할지라도 시집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음으로써, 전체적인 주제와 의미, 감상을 헤아린다. 이는 시 읽기에는 정답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기도 하다. 시를 읽는데 수능 문제 풀이 식의 독해가 당치도 않으며 가능치도 않다. 수능 문제 풀이식의 시 읽기는 유사성과 근접치를 좇는 것이다. 한 편의 시에 대한 유사하고 근접한 공유 가능한 공통치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시는 문학이다. 문학은 예술이고, 예술적 체험은 개별적이다. 그러므로 감상은 주관적이다. 정답이 있다는 생각에서의 시 읽기는 오독과 오해가 뒤따른다.


 시인에 의해 정제된 언어는 일반적이지 않아 쉬이 읽히지 않고 연거푸 반복해서 읽더라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오해한다. 그럼에도 시의 낱말들을 헤아려 시의 의미를 이해하려는 행위와 태도에서 나름에 의미를 얻고 만족을 느낀다. 한 권의 책을 읽는 것은 한 사람을 마주 대하는 것이다. 생각과 감정을 언어로 가공하고 정제하여 표현한 시들을 읽어나가는 것은 마치 사람의 마음결을 헤아리는 것과도 같다. 어찌 보면 내게 있어 시 읽기란 사람을 이해하려는 의지의 일환이자 발로일지 모른다.


 사람은 서로 다르기에 온전히 타인을 이해할 수 없다. 오해는 빈번하다. 오해는 때로 다툼과 상처를 남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출 수 없다. 노력을 거듭하다보면 온전히 그를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오해의 폭은 줄여지지 않을까. 그리 생각한다. 그로써 못내 족하다. 시를 오독하며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적잖이 위안을 얻는다. 아무래도 앞으로도 오독하는 시 읽기를 계속할 것 같다. 조금 더 이해하기 위해서. 시와 사람을 헤아릴 나날이다. 감히 바라는 것은 시 읽기도, 사람을 헤아리는 것도 포기하지 않음이다.


(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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