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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Mar 20. 2023

공감과 감수성에 대한 단상


나는 공감하지 않는다, 이에. 오늘날 공감과 감수성은 누군가의 전유물 또는 전리품쯤으로 여겨지고 있다. 적잖은 이들이 공감과 감수성을 특정 부류만이 할 수 있고 느끼는 것으로 여긴다. 전유물로서, 공감과 감수성은 생득적인 차이를 가지고 불가변한 것으로 고정된다. 선천적으로 보다 남들에 비해 공감능력이 뛰어난 부류가 있고 그들만이 공감의 능력과 감수성이란 재화에 탁월성을 가지는 것이다. 이로 인해 사회적 문제에 따른 갈등 및 대립 관계에서 공감과 감수성은 그들의 전리품으로서 기능한다. 전리품으로서, 공감과 감수성은 갈등 및 대립 관계에서 상대측으로부터 빼앗은 것이나 진배없다. 공감과 감수성이란 상대에게는 없고 오직 그들 자신들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공감과 감수성에 대한 섣부른 단정은 공감능력이 뛰어나고 감수성이 풍부한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모두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전자에게는 번거로움을 끝없이 야기하고, 후자에게는 수고로움을 마다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전자는 공감과 감수성이라는 재화를 남김없이 소비하다 제 풀에 지친다. 이들은 어떠한 사안에 왜 자신은 공감하는데 당신들은 공감하지 못하냐며 외치다 스러진다. 후자는 너무 이르게 공감하길 포기하고 만다. 공감은 자신의 것이 아니므로 공감하지 않기를 일삼다 누구에게도 공감 받지 못하는 상황에 이른다.


 이는 지나친 과장이나 비약일지도 모른다. 요는 공감과 감수성은 누군가의 전유물도 전리품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감과 감수성은 공공을 위한 가치이자 재화이다. 공감과 감수성은 태생적인 차이는 있을지라도 불가변의 고정된 것은 아니다. 개인과 집단의 노력을 통해 공감능력과 감수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이는 공감과 감수성의 영역을 감정의 영역이 아닌 지성의 영역으로 확장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공감과 감수성을 단지 감정의 영역에 국한한다면 이는 동감에 따른 동조로 그친다. 동일한 감정에서 동일한 생각으로 나아가 동일한 행동으로 무장한 동일성은 획일성에 지나지 않으며, 이는 그 자체로 전체주의적이다. 언뜻 위력적일 수는 있으나 위세가 강하다고 보긴 어렵다. 감정이 동일하더라도 감정의 온도가 저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한 감정의 들끓는 몇몇 소수만이 공감과 감수성을 전유물과 전리품으로써 행사한다. 그러나 그들 외에 공감을 불러오지도 감수성을 일으키지도 못한다.


 공감과 감수성을 지성의 영역으로 확장해야 한다. 사전적 의미로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며, 감수성은 ‘외부 세계의 자극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성질, 자극이나 타인에 대한 반응과 관련된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넓은 의미로 감각의 예민성.’이라고 한다. 느낌의 정도와 능력은 개인마다 다르다. 이는 태생적으로 다른 것이며 동시에 경험과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고로 교육과 학습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 개인 스스로도 스스로의 공감능력과 감수성을 향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뿐만 아니라, 집단과 사회도 구성원의 공감능력과 감수성이 향상될 수 있는 토양과 터전을 마련해야 한다.


 이는 공감과 감수성이 전유물도 전리품도 아니기에 그렇다. 개인의 또는 몇몇 소수만의 것이 아니다. 나와, 다른 모두를 위한 것이다. 감정을 넘어서 지성의 영역까지 나아가, 지적으로 향상된 감수성과 공감 능력으로 나와 타인, 사회에 만연한 갈등과 대립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지적 감수성과 지적 공감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공부가 서로 모두 같지 않더라도 오히려 서로 같지 않기에, 나와, 다른 모두를 위한 길인 것이다.


 이에 나는 공감한다.


(22.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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