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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설 Apr 26. 2023

23.04.25. 스즈메의 문단속

다이진, 소타가 맡은 요석의 역할과 희생에 관하여

 <스즈메의 문단속>은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의 출입을 막기 위해 여고생 스즈메가 동분서주하는 영화이다. 미미즈의 출입을 막기 위해 문단속을 가업으로 삼은 ‘토지시’ 소타는 스즈메의 무지로 인한 실수와 요석이었던 다이진의 난동으로 문단속 임무를 수행하는데 제한이 생기고, 토지시의 역할을 스즈메가 함께 또는 대신하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다이진이 맡았고 소타가 맡게 된 ‘요석’과 그 역할이었다. 다이진은 미미즈의 전면 등장으로 인한 대규모의 지진 참사를 막기 위해 오랜 시간 ‘봉인석으로서 또는 봉인석으로써’ 요석의 임무를 수행했다. 스즈메에 의해 봉인이 풀렸을 때, 다이진은 오래 굶주려 삐쩍 곯은 ‘고양이’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다이진은 자신에게 호의를 베푼 스즈메에게는 호감을 보인 반면, 자신에게 요석의 역할을 부여한 토지시의 후손인 소타에게는 적개심을 드러내며 소타를 ‘의자’로 만든다.     

개구쟁이 고양이 같은 다이진은 유아적인 성격과 발화로 스즈메와 소타에게 도움을 주고도 이해받지 못하고 지탄받는다. 소타는 다이진에게 원래대로 요석으로 돌아가 미미즈의 출입을 막을 것을 강요하나, 다이진은 요석의 임무는 소타가 의자가 되는 주술을 받음으로써 짊어지게 됐다고 한다. 소타는 마지못해 요석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요석으로서 또는 요석으로써 임무를 수행하며 인격의 상실을 겪는다. 스즈메는 소타를 ‘희생’시켜 수많은 사람들을 대규모 지진으로부터 지켜낸다.     


소타를 구하려는 스즈메를 소타의 할아버지는 만류한다. 소타는 요석의 역할을 맡아 신이 되어 그 힘으로 미미즈를 봉인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타를 사랑하는 스즈메는 소타를 구출한다. 요석의 공백으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려 하나 다이진과 좌다이진이 요석의 역할을 다시 받아들이며 영화는 ‘사람들’의 행복한 결말로 끝난다. 그렇다. 영화는 사람들만의 안녕과 평화로 끝난다.     


영화는 요석에 얽힌 이야기를 풀며 오래 전 저승 문턱을 넘어 이승으로 나와 지진을 일으키는 미미즈의 출입을 막기 위해 동서 지방의 주요한 목에 요석을 박아 넣었다고 한다. 그런데 소타 할아버지의 좌다이진에 대한 존대나 요석이 된 소타를 두고 한 발화로 봤을 때, ‘요석’이란 것은 애초부터 신격이나 신력을 갖고 있는 존재는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 요석은 요석의 역할을 맡게 되면서 신격이 생기고 신력이 자라나 그 신묘한 힘을 통해 오랜 기간 점점 더 거세지는 미미즈의 난동을 막아온 것이다.     


여기서 문제시되는 것은 요석의 역할을 맡은 그것이 살아있는, 일종의 지적생명체, 또는 인격체냐는 것이다. 인간 수준의 사고와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적 생명체가 타의에 의해, 타인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강제 받은 것은 일종의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요석의 역할을 맡기 전까지 다이진과, 좌다이진의 행적을 보여주진 않지만, 봉인이 풀린 다이진과 좌다이진은 엄연히 말과 생각을 하는 지적 존재이다. 또한 소타는 요석의 역할을 강제로 맡는다. 평범한 교사의 삶을 꿈꾸던 소타의 경우만 치더라도, 이들은 다수의 재앙을 면하기 위해 책임을 강요받은 소수의 희생양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요석이라는 강제로 부여받은 역할에 따라 신격과 신력을 갖고 신통력으로 지진을 막고 사람들의 안녕을 꾀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오직 그 자신외의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이러한 면면은 일종의 ‘원령신앙’ 또는 ‘어령신앙’적 요소로 보인다. 이는 일본의 전통 민간신앙으로 인명을 위협하는 재해나 전염병의 발생을 원한을 품고 죽은 원혼의 소행으로 보고, 이 원혼을 경외하고 모셔 신통력의 수혜를 받아 재앙을 면하는 것이다. 재앙을 피하고 평화를 바라기 위해 원혼마저도 신통력의 수단으로 삼는 것이라면 과언일까. 일제강점기에 동원되어 희생된 조선인 2만 1181명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또한 ‘어령신앙’의 요소를 갖고 있다. 야스쿠니(靖國), 평화로운 나라, 나라의 평안을 꾀하는 이 신사는 자국의 평안을 위해 일제강점기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들을 신으로 추켜세운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전범들과의 원치 않은 합사를 겪고, 일본의 평안을 위해 신으로 모셔지는 행태가 일본 제국주의에 희생된 조선인들의 원혼을 달래는 옳은 방식의 위령이겠는가? 그저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희생을 강요받는 것이지 않을까?     


한편 <스즈메의 문단속>은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피해자들의 마음을 달래고 치유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며 한껏 즐기지 못하고 관동대지진을 떠올릴 수밖에 없음에 안타깝다. 관동대지진 발생 후 일본의 정부 당국은 혼란을 수습하고 국민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이 사회혼란을 야기했다는 낭설을 퍼뜨리고, 조선인을 대상으로 일본 관민이 합동하여 집단학살을 자행하였다.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의 반감과 적대감이 한데 모여 무자비한 폭력으로 나타나 조선인들은 희생양이 되었고 이를 통해 일본은 제 나름대로 지진을 수습하였다. 일본 사회의 평안을 위해 죄 없는 조선인들이 희생된 것이다. 동일본대지진의 희생자들처럼 관동대지진으로 인한 관동대학살의 희생자들 또한 위로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여러 푸념 아닌 푸념을 마치고 다시 영화로 돌아와, 다이진은 스즈메의 의도치 않은 실수로 봉인이 풀려나고, 스즈메가 자신에게 음식을 주며 호의를 베풀자 스즈메에게 호감과 애정을 보인다. 이에 미미즈의 출현을 예지하고 점지하며 스즈메를 이끌면서 동시에 그간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한다. 영화는 좌다이진을 맡은 바 책임을 다하는 성숙한 모습으로 그려내고, 다이진을 유치하고 대책 없는 개구쟁이로 그려내지만, 다이진의 모습이 오랜 기간 희생당했던 이가 누리는 평안이라면 과연 이를 지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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